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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Feb 12. 2016

꿈은 손을 힘껏 뻗은 1mm 앞에 있어

일본 아이돌 덕후,  <프로듀스 101>을 보다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지난 12월 17일, 프로듀스 101 의 <PICK ME UP> 무대를 생방송으로 처음 본 날. 굉장히 놀랐었던 기억이 난다. 일본 아이돌 AKB48의 콘서트에서나 볼 법한 대규모 인원으로 구성된 무대였기 때문이다.  

101명의 소녀들이 모여서 뿜어대는 박력이란.


삼각형으로 구성된 네 개의 무대가 등장하고, 각 무대들이 합쳐지는 과정도 과정이지만 그 위에서 똑같은 핑크색 교복을 입고, 똑같이 머리를 전부  풀어헤친 101명의 소녀가 EDM에 맞춰서 손을 허공으로 찌르며 일사불란하게 폴짝폴짝 뛰어대는 장면의 임팩트란...!! 생각보다 엄청 강렬했다. (심지어 노래 제목도 후렴구의 후크도 서로 자신을 뽑아달라고 아우성치는 'Pick me up' 이다!)


이것은 하늘에 맹세코, 내  살아생전에 한국 방송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던 비주얼이었다. 특히 일본 아이돌 특유의 '이 중에 네가 좋아하는 애가 한 명쯤은 있겠지' 식의 떼거지 전술을 비웃던 대한민국의 대중들에게 저런 무대를 선보이다니. 슈퍼주니어도 소녀시대도 엑소도 데뷔 당시에는 '멤버가 너무 많다'며 욕을 먹지 않았던가. 그런데 101명이라니? 그 충격은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던지, 프로듀스 101의 데뷔 무대는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영상은 짤방으로 제작되었으며, 그 짤방들에는 항상 '충격과 공포'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녔다.


마치 AKB48의 도쿄돔 콘서트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이 아닌가.


사실, 중학생 때 모닝구 무스메를 통해 이미 일본 아이돌 덕질을 시작했었던 내게는 저렇게 여자들이 떼거지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아주 낯설거나 기괴하게 느껴지는 풍경은 아니다. 방송으로 공개되는 오디션으로 멤버들을 뽑는 형식도 사실 모닝구 무스메를 통해 이미 경험을 했던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공개 오디션과 노골적인 순위 매기기로 인한 선발 시스템은 일본에 비해 20년은 늦게 도입된 것 같이 보인다. 다만, 익숙한 포맷의 오디션과 경쟁 미션을 수행해 내는 프로그램 속 '소녀'들이 한국어를 구사하고, 한국 걸그룹의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 아직도 내게는 너무도 신기할 뿐이다. 어떻게 봐도 일본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데 말이다.


모닝구무스메의 방송 공개 오디션을 자주 봐 왔던 내게 <프로듀스 101>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아이돌이라는 극한 직업 :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나라의 걸그룹 프로듀스 시스템은 철저히 베일 아래 가려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습생들을 꼭꼭 숨겨두고 몇 년 동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깐깐한 대중들이 웬만해선 흠잡지 못할 만한 어느 정도의 레벨에 올랐을 때 데뷔시키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미완성'된 형태의 소녀들이 떼거지로 쏟아져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한민국에서 방영될 줄이야.


문제는 이 오디션의 형식이나 분위기는 일본식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특성이 일본과 다르다는 점이다. 일본 아이돌과 한국 아이돌은 그 자체적인 특성도, 받아들이는 팬덤의 특성도 다르다. 대표적으로 다른 점으로는 다음 두 가지를 뽑을 수 있다.


철저한 선택과 집중 vs 파트 분배는 공정하게


일본 아이돌의 경우,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될 성 부른 떡잎'에 아낌없이 몰아준다. 이것을 '푸쉬'라고 한다. 각 아이돌 그룹에는 그 그룹의 '얼굴마담'격인 푸쉬멤버가 있는데, 보통 푸쉬를 가장 많이 받는 멤버를 '센터'라고 한다. 이러한 센터의 역할을 부여받은 아이돌은 한국 사람들이 보는 기준에서는 전혀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보통 센터의 자리에는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이 서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철저하게 해당 멤버가 가지고 있는 매력(외적이든, 캐릭터 적인 측면이든)과, 가운데에 세웠을 때의 '느낌'을 보고 결정한다. 그리고 그 자리는 처음에는 '쟤가 왜 센터야?'라고 생각하지만, 보면 볼수록 왠지 묘하게 빠져들어 납득하게 되는 볼매들이 차지하고 있다. 얼굴이 예쁘다고, 춤을 잘 춘다고 센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심을 잘 잡아줄 수 있으면서, 묘하게 매력을 끄는 '아우라'가 있어야 한다. 일본의 아이돌은 그러한 '느낌'을 중심으로 서열이 매겨진다. 선택을 받지 못하는 멤버들 또한 자신의 분수를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자신이 센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센터의 자리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멤버들은, 무대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없지만 다른 방면에서 스스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는 편이다. (예능형 캐릭터를 개발한다던지, 성우를 한다던지 등)


 극단적으로는 이렇게 센터 한 명만 노래를 하고, 나머지 멤버는 전부 백업 댄스만 하기도... (℃-ute, )


이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과 집중은 AKB 사단의 '선발 총선거'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선발 총선거는 일종의 인기투표로, 200명이 넘는 AKB 사단의 멤버 중  인기투표를 통해 특정 순위 안에 든 멤버만 음반에 참여할 수 있다. 높은 순위의 멤버에게는 당연히 좋은 포지션이 주어진다. 덕후들은 매년 총선 시즌이 돌아오면 CD를 사서 자기가 좋아하는 멤버를 '앞줄'에 세우기 위하여 투표를 하게 된다. 총선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양상이 과열되고 있어, 한 명의 덕후가 수백 장 수천 장의 CD를 사서 투표를 하기도 한다.


AKB48 선발총선거. 노래를 부르려면 인기투표의 순위가 높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나라에서 아이돌 그룹이 데뷔했는데 5명의 멤버 중 1명에게만 노래를 부르게 하고, 나머지 4명은 코러스만 합창으로 부른다면? 완전히 난리가 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멤버에 비해 불쌍해 보이거나 뭔가 기우는 멤버가 있는 것을 싫어한다. 3분짜리 노래를 열 명이 넘게 부른다 해도 합창 후렴구가 아닌 '개인 파트'가 있어야 한다. 단 한 마디를 부르더라도 멤버 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파트가 확실히 있어야 한다. 하물며 멤버들에게 순위를 매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적어도 프로듀스 101이 있기 전까지는!) 개인 팬, 잡팬 등의 용어가 있을 정도로  특정 누군가만을 좋아하는 행동을 배척하고, 모두를 '똑같이' 좋아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국내 팬덤의 환경에서 이와 같은 무한 경쟁 형태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등장한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하게 vs 여신이어도 극한직업


우리나라 사람은 일단 아이돌이라고 해도 '가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가창력과 댄스 실력은 갖추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엄격한 기준은 신인이라 해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쁜 애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성격도 좋고, 연기력도 갖추어야 하며, 예능 센스를 위한 개인기도 갖추어야 하고, 심지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기를(!) 원한다. 어디 그 뿐이랴, 운동 신경도 좋아야 한다. ('아육대'라는 것이 생긴 이후로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일본은 다르다. 일본의 대중들은 애초에 아이돌을 '가수'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가창력이나 화려한 댄스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대신 들에게는 아이돌과 다른 범주의 '가수'인 '아티스트'라는 가창력이나 예술성이 필요한 별도의 뮤지션 개념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돌에게 큰 기대치를 갖지 않을 수 있다.  아이돌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오로지 '계속해서 지켜봐 주고 싶은 귀여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진짜 옆집에 살 것 같은 정말 평범한 소녀가 아이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아이돌이 저평가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한, 그런 소녀들이 꼭 '완성형'일 필요도 없다. 갓 데뷔한 아이돌은 미숙하면 미숙 한대로 귀엽다고 생각하며, 실수하더라도 귀엽게 실수하면 괜찮다는 분위기랄까. 다만 해가 갈수록 뭔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 것 같기는 하다. 어쩌면 일본 아이돌 덕후들은 자신이 응원하던 미숙하기 그지없던 소녀가 완벽한 아이돌로 환골탈태하는 자신만의 성장 드라마를 즐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응원으로 소녀의 총선거 순위가 올라갈 때, 마침내 그 소녀가 그룹의 센터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 그 갭에서 오는 짜릿함을 즐기는 것 같달까. 일본 덕후들이 아이돌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방식은 진정 육성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옆집 소녀 같은 친근한 소녀가 아니라, 모델 같은 몸매, 배우 같은 얼굴, 댄서 같은 댄스 실력에 솔로 싱어송 라이터 같은 가창력까지 소유한  완벽한 여신을 원한다.

신인 아이돌이  데뷔하자마자 전문가  못지않은 깐깐한 눈을 가지고 새로 등장한 아이돌 멤버  하나하나의 외모와 실력, 댄스, 분량 등을 뜯어보며  '흠잡을 데 없는 한 명'을 골라내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대중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극한 직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프로듀스 101에 대한 대한민국 대중들의 반응이 너무도 궁금하다. 완성형 아이돌을 원하는 대한민국 아이돌 시장에, 성장형 아이돌을 들이대는 콘텐츠가 등장한 것도 흥미로운데. 그동안 대한민국 대중들이 질색해 왔던 포인트들 (무한 경쟁, 등급에 따른 차별, 방송 기회의 불공정함 등..)도 여과 없이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계급을 상징하는 피라미드 형태의 피사체가 곳곳에 노골적으로 포진되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프로듀스 101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프로그램에 몰입하는 대중들의 심리가 순수한 응원 심리나 재미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토록 불공정하다니!' 혹은 '이렇게나 잔인하다니!'라는 마음으로 소녀들의 억울함에 몰입된 심리가 더 크지 않을까. 다소 식상한 표현일 수 있으나, 무한경쟁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대중들의 입장에서 프로듀스 101의 소녀들이 처한 잔혹한 상황은, 본인의 삶에 처한 경쟁상황을 잊게 해 줄 만큼 더욱 힘들고 고되고 불공정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서 프로듀스 101은 독특하다. 왕년에 일본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챙겨 보던 일본 아이돌 덕후의 입장에서, 지금의 이 심상찮은 열기는 분명 주의 깊게 지켜보고 싶은 하나의 현상이다.

개인적으로는 만약 이 프로그램을 일본에서 했다면, 투표 결과나 네티즌 반응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띄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이 든다. 일단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까탈스러운 대중들을 만족시키려 허덕이는 소녀들의 모습이 많이 애처로울 뿐..


대표적인 일본식 아이돌 양성 프로젝트인 프로젝트 101이 대한민국의 척박하고 가혹한 환경을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내게  될지, 조금은 더 지켜볼 일이다.


 

"꿈은 손을 힘껏 뻗은 1mm 앞에 있어."



AKB48의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는 말했다. "꿈은 손을 힘껏 뻗은 1mm 앞에 있다"고.

희망을 주는 동시에 절망을 주는 잔인한 말인 것 같다. 그렇지만 어쩌랴, 인생이 바로 그런 것을.

우리가 아이돌에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그 손 끝에 닿을 듯한 꿈을 향해 버둥거리는 소녀들의 순수함과 절박함이 담긴 몸짓인 이상에야. 그저 안타까우면서도 애틋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봐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녀들아, 조금 더 힘을 내고 손을 힘껏 뻗어봐.

꿈은 바로 그 손 끝이 닿은 1mm 앞에 있거든.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모순과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력이 반드시  보답받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노력하는 사람이  보답받았으면 합니다.

모두 목표가 있고 꿈이 있겠지만, 그 노력이 언제 평가받고  보답받을지는 모릅니다.
모르는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힘들지만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팬 여러분은 반드시  봐주십니다.
이것은 제가 AKB인생을 통해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세요.

- 다카하시 미나미, 제 7회 AKB 선발 총선거 스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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