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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Feb 23. 2016

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대니쉬 걸>을 보는 내내 이 책을 생각했다.

지난 주말, 혼자 극장에 가서 영화 <대니쉬 걸>을 보았다.  평소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에 대해서 먼저 찾아보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을 우연히 접한 뒤부터 이상하게 계속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던 탓이다.


이 영화는 한 명의 남자가 여자가 되어, 마침내 '완전한 자기 자신'을 찾기까지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에디 레드메인이 연기했던, '에이나르 베게너'로 태어나 '릴리 엘베'인 채로 죽었던 사람은 실제로 역사 속에 존재했다. 그런 그를 한결같이 믿고 지지해 줬던, 그의 아내 게르다 베게너의 존재 또한 사실이었음은 물론이다. 엔딩 크레딧에 올라갔던 것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아내는 그의 죽음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릴리 엘베를 화폭에 담아냈다고 한다.





릴리 엘베는 역사에 신원이 밝혀진 채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성전환 수술자로, 당시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센세이셔널한 존재였다고 한다. 그가 1920년대 당시 받았던 수술은 이전에 아무도 받았던 적이 없는 수술이었기 때문에,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수술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에 그가 수술을 받았던 내용을 보면, 타인의 난소와 자궁을 그에게 통째로 이식하는 수술은 현대 의학 기술로도 도저히 실현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끝난 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에는 그의 용기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가 언급되기도 한다. 그가 용기를 내어 수술을 했던 덕분에 후대의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면서. 어쩐지 씁쓸했다. 생각해보면 저런 엄청난 수술을 한 누군가가 최초에 분명히 있었을 텐데, 그 '최초의 존재'에 왜 여태껏 나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도 괜스레 자문해 보게 되더라.


영화에 대한 나의 감상과는 별개로,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책이 한 권 있어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작년 말 SNS에서 잠시 화제가 된 바 있던 그 책의 제목은 바로 『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다.





이 책은 한 남자가 실제로 진행했던 '여자 사람 체험기'를 책으로 낸 것이다. 독일의 방송 제작자 출신에, 여유로운 직장에서 일하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살아가던 크리스티안 자이델은 어느 날 문득 여자의 삶을 체험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든 직후, 1년 간 '여장'을 하고 살아보는 색다른 실험을 시작하게 된다. 동네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아내와의 부부 관계 등,  그때까지 자신이 '남자'로서 평범하게 누려왔던 모든 일상들을 위기에 빠트리면서까지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인 '크리스티안'을 여성형으로 바꾼 '크리스티아네'로 점차 여장 후 과감하게 활동 반경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그가 '실험적 여장'을 결단하고, 철저히 미지의 영역이었던 '여자'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체험하기 시작하며 겪는 내면의 변화는 어딘지 모르게 <대니쉬 걸>의 주인공, 릴리 엘베를 떠올리게 한다. 그 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는 '아, 뭔가 그 책에서 이런 상황 본 것 같아!'하는 순간들이 가끔 있었다.



최초에 '스타킹'이 있었다



영화 속의 릴리 엘베처럼, 이 책 속의 크리스티안이 여장을 결심한 계기는 바로 '스타킹'이었다. 추운 날씨에, 땀 차는 내복을 입기 싫었던 그는 우연히 들어가게 된 여성 속옷 매장의 화려함에 매료된다. 남자 속옷 코너의 칙칙함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색감에 좋은 향기까지 가득한  그곳. 그에게는 마치 '여자들만의 영토'로 보이는  그곳에 입성한 그는 순간 이 모든 것을 일상적으로 누리고 사는 여자들의 삶이란 어떤 것일지 상상해본다. 결국 남자, 여자로서 나뉘어 사는 삶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밴드 스타킹을 구매하려 계산대에 서서 '여자 사람으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스타킹을 처음 신어 보는 것으로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한다.


어쩐지 스타킹에 예민한 영혼이 깃들어 있어 손끝으로만 만져야 할 것 같았다.
한 짝만 신었는데도 벌써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보들보들한 스타킹을 신고 있는 동안에는 이상하게 성격마저도 보들보들해진 기분이었다.
뭐랄까, 연약하면서도 동시에 강해진 느낌, 어쩌면 아주 조금 여성스러워진 느낌.
솔직히 말하면 남자인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여성스러운 그 느낌이 편안하면서 좋았다.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나는 창피하면서 동시에 기분이 좋았다!


아마 <대니쉬 걸>의 릴리 엘베가 처음 모델을 대신해서 스타킹을 신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렇듯 특히 영화 초반에 비치는, 아직 '에이나르'인 상태의 릴리 엘베의 모습을 보면 유독 크리스티안의 모습이 많이 겹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자로서 스타킹을 처음 신는 모습이나, 남자일 땐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시선들에 불편함과 짜릿함을 동시에 느끼는 장면이라던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미묘한(?) 모습으로 아내와 섹스하며 전에 없던 성적 격렬함(해방감?)을 느끼는 장면 등등 말이다.


모든 시선이 내게 떨어졌다.
나는 이상하게 벌거벗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남자라는 게 금세 티 날 텐데...
사람들의 시선이 기분 좋았다.
내가 마음을 열면 남자들의 시선이 조금은 더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 미소로 답하면, 여자들이 여자에게 보내는
눈빛과 비슷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도 있었다.
내 미소에 미소로 답할 때 남자를 보면 나는 정말 가슴이 벅찼다.
다시 찾아온 여성성은 격정적 삶의 에너지다.
그 에너지로 나는 거칠 것 없는 열린 사람이 된다.

나는 안전하지도 불안전하지도 않다.
더는 무기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통제하지도 않는다.
나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모든 대립이 사라졌다.


중간에 아내인 게르다가 "I need my husband"라며, 릴리 엘베가 되어 버린 에이나르에게 불안하게 내뱉는 장면 또한 크리스티안의 여장 체험 기간 중, 그의 아내가 남편의 여장 생활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하는 부분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크리스티안의 실험 때문에 남편을 잃을까 봐 두렵다고 했다. (사실, 크리스티안의 아내는 크리스티안이 여장을 한 모습을 직접 보려고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여장에 거부감을 표시했었다.)


"그런 걸 도대체 왜 하는 거야? 나랑 사는 게 불행해? 나한테 뭐 서운한 거라도 있어?"
"난 크리스티아네가 아니라 크리스티안을 원해."



어찌 됐든 최초의 맥락에서 보면 '남자'로 살아오던 그들이 처음으로 여장을 하며 느끼게 된 그 감정들이 크게 다르진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속으로 그 둘을 비교하며 영화를 보던 나는  그 두 사람의 자아 - 릴리 엘베와 크리스티아네-를 각각 영원의 존재와, 1년짜리 존재로 만들었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일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들 둘 다 여장을 시작할 당시 아내가 있었고, 가정이 있었고, 직업이 있었던 젊은 남성이었음은 똑같은데.

크리스티안은 단지  '크리스티아네'로서의 1년 간의 짧은 유희를 즐겼을 뿐이고, 릴리 엘베는 그 이름에 자신의 온 인생을 걸었을 뿐인 걸까?



크리스티안의 코스프레


일단, 크리스티안은 여장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에게 강요해 왔던 '남성스러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고정된 성 역할로부터도 탈피할 수 있었다. 또한 더 이상 여장을 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여성성에 대해 굳이 거부할 것 없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남자들이 하면 '꼴불견'이라고 말하는 모든 '여성스러움'을 자신의 내면적인 가치로 소유하게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에게 여장은 일종의 해방이었던 셈이다. 여장을 통해 자신을 찾은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여장이 필요치 않게 됐다. 여장 생활을 종료하며, 그는 이런 감상을 남긴 뒤 결국 다시 남자의 삶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남녀 사이에 철조망, 장벽, 지뢰밭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쨌든 자연적인 경계는 없었다. 있다면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접촉하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국 남녀 구별은 아주 사소한 일이 아닐까?
우리는 같은 사람이고 다만 서로 다른 상황에서 사는 게 아닐까?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나는 나로 돌아왔다.
여성성을 느끼기 위해 여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나였다.



릴리 엘베의 날개옷


여장이 '해방'이었던 점은 릴리 엘베에게도 마찬가지지만, 릴리 엘베의 경우에는 크리스티안과는 다른 단계의 '해방'이었다는 점이 다른 것 같다. 요즘에야 다양한 성적 소수성을 인정하는 흐름이 눈에 띈다 해도 1920년 당시의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릴리 엘베는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억압당하고, 속박당해왔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여성적'이라고 표현하는 세심함, 꼼꼼함 등의 특성으로 스스로도 자신을 여성적인 남자라고 믿었을 수는 있지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에이나르'라는 가짜 가면 뒤에서 억압받던 릴리는 결국 에이나르가 용기 내어 여장을 하고, 그 모습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동안 스스로를 숨겨왔던 세월이 아깝다는 듯,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듯 게걸스레 에이나르를 흔적도 없이  집어삼켜 버린다. 마치 선녀가 날개옷을 입자마자 날아가듯이, 그에게 스타킹을 신기고, 드레스를 입히고, 가발을 씌워 '날개옷'을 입혀버린 아내 게르다는 남편을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 게르다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서운한 이야기였겠지만 "에이나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릴리 엘베의 말은 아마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에이나르는 당시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대로, 튀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 릴리가 만든 가면이었을 뿐. 그래서였을까, 영화 말미에 릴리 엘베가 다 쉰 목소리로 힘겹게 토해내는 외마디 외침이 그토록 강렬하게 와 닿았던 것은.



I am, entirely, myself!
드레스덴의 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마친 뒤 릴리 엘베는 드디어 스스로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육체를 갖게 된다.



그 존재를 위해 거짓말로 노력할 필요도, 실재를 증명할 필요도 없는 진정한 '자신'. 그가 마지막 순간에 찾았던 건 바로 그 자기 자신이었다. 원치 않던 육체를 벗어나, 그는 진짜 '자신'이 된다.


크리스티안의 여장이 자신이 아닌 다른 캐릭터의 '옷'을 입고 그것을 연기하는 코스프레였다면, 릴리 엘베의 여장은 그녀를 억압해 온 모든 것들로부터 탈출시키고, 본래의 힘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날개옷'이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 이 책을 다시 보면서,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들을  곱씹을수록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영화에 대한 생각과 책에 대한 생각이 묘하게 뒤엉킨다.


그래도 이 책을 봤기 때문에, 이 영화를 조금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에이나르가 처음 여장을 할 때의 감정선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이 책 속의 구절들이 많이 떠올랐고, 그 구절들을 떠올리며 영화 속 에이나르에게 더욱 이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나르와 릴리 엘베까지는 아니어도, 남자로 살아가다 한 번쯤 '여자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를 궁금해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기 전후에 이 책을 같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른 성별로 살아볼 수 있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기에.


원한다면 직접 용기 내어 '스타킹'을 신어봐도 좋고.



'Air de Capri' - 1923 - Painting by Gerda Wegener (Danish,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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