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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Oct 30. 2016

광장의 추억

그래도 아직은 광장에 있고 싶다.

2016년  10월 29일, 나는 친구와 함께 광장으로 나섰다. 우리가 처음 함께 청계광장에 나갔던 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였으니 벌써 8년이나 지났다. 그 8년간 우린 달라지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광장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후의 결과에서. 촛불 하나에 희망을 품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광장에 나가게 했던 분노


내가 처음 광화문 광장에 갔던 건 14년 전, 지금 내 나이의 딱 절반쯤인 15살 때였다.

당시에는 내 나이 또래 소녀인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었다. 미군이 장갑차로 그 소녀들을 고의로 깔아 죽였다는 충격적인 이야기. 그 소녀들을 추모하기 위한, 그리고 미군에 항의하기 위한 촛불집회가 진행된다는 소식에, 학교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당시 함께 몰려다니던 친구들과 함께 '원정대'를 구성하여 서울 시청역으로 무작정 떠났던 적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내가 결심한 일들 중에는 상당히 강한 의지로 내린 결정이었다. 사실 나는 같은 해 있었던 2002 월드컵의 거리응원을 동경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좀처럼 광화문 광장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었다. 서울까지 지하철을 타고 간다는 것이 무섭기도 하고,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질릴 정도의 인파-심지어 점점 더 많아진다!-가 두렵기도 했기 때문이다. 단지 모두가 함께 즐거운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라면 집구석에서 가족들과 함께 소소하게 외치는 '대~한민국'이나 광장에서 외치는 '대~한민국'이나 뭐가 크게 다를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달랐다. 나는 사고로 인하여 원통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미선이, 효순이의 또래로서 그 문제에 온전히 분노하고 있었고, 매일같이 새로 발표되는 뉴스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불공정해 보이는 SOFA 협정과 그에 따른 무죄 판결 사실은 내 안에 꼭꼭 여미고 잠가두었던 어떤 것을 기어이 꺼내들게끔 만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서울은 매우 추웠다. 칼바람이 숭숭 부는 날씨 자체도 무서웠지만, 두터운 겉옷을 벗어 시청역 사물함에 넣어두었기 때문에 더욱 추웠다. 그 이유가 아무도 볼 수 없는 상품 택 부분에 그려진 성조기 때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의 나는 정말로 순진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나의 겉옷이 미국산임을 알아보고 내 목 뒤를 까뒤집어 성조기를 확인하면, 나는 더 이상 그 무리에 끼지 못하고 왕따를 당하고야 말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촛불을 손에 들고, 온몸을 달달 떨면서. 내 인생 속, '광장'으로 나간 나의 첫 기억은 바로 이렇게 시작이 된다. 무지하게 추웠던 날씨와 배가 고프고 힘겨웠던 그 느낌 또한 공감각적으로 되살아 날 정도로 생생하다.


단상 위에서는 미국 정부를 규탄하는 연설이 진행되고,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는 공연을 하고, 다 같이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 행진을 한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도 새롭고, 너무도 넓었다. 단지 무언가를 추모하기 위해, 아니면 어떤 특정한 의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이 많은 군중이 한 자리에 운집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광장'은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추모 공연 후에 머리를 삭발하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회'라며 순수한 시위자들 뒤에서 쿵짝쿵짝 공작을 벌이고 있던 진보 계열의 정치인들까지.


첫 촛불집회에 대한 기억은, 어리둥절한 느낌과 왠지 모를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단지 미선이 효순이의 일이 안타까워서 참석했을 뿐이고, 법이 주한 미군에 유리하게 적용된다는 것에 분노했을 뿐인데,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이 수많은 사람들의 흥분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려 했다. 주한 미 대사관으로 사람들을 몰았고, 흥분한 대중들에게 '주한 미군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원한 것이 정말 그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순히 또래의 친구의 죽음에 아파하고, 공정한 처분을 원했던 마음이 왜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시켜라'라는 정치적 문제로, 반미 감정으로 비약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한 번의 집회 참여 이후, 나는 그 전과 별다를 것 없는 한 명의 평범한 여중생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집회나 시위 등, 정치적인 일은 나와는 먼 일이 된 채로 그 일은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잊혀 갔다.



2008년 여름, 끝없는 좌절


2008년 5월, 나는 대학생이었다. 내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에 조치에 항의하는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때마침 종로에서 약속이 있었던 나는, 당시 함께 참석했던 친구들과 함께 청계 광장으로 향했다. 미국산 쇠고기와 광우병 문제에 대한 이슈는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고, 처음 집회에 나간 마음은 그렇게까지 무겁고 진지하진 않았다. 그냥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서 얘기하고 있나?'에 대한 호기심이 절반이었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저 사람은 어쩜 저렇게 국민들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하는 건지, 게다가 좋든 싫든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라니 남은 임기가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져 어떻게든 그 반감을 표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최초에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하게 된 2008년 5월 3일의 청계 광장 촛불 집회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미선이 효순이 집회와는 달리, 집회 초기라서 인지 그 순수성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어른들이 주도하는 경향도 있긴 했지만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하나 둘 식 연단으로 올라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감성으로 재기 발랄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미친 소 가면을 뒤집어쓰고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뭔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존의 집회 경험과는 달리, 이것은 우리의 의사를 표시하면서도 그 자체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우리만의, 우리가 만들어가는 콘텐츠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꽤 순수했던 것 같다. 집회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면, 그것도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모여서 내는 목소리라면 정부에서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참여했던 최초의 시위는 반미 시위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정상 딱히 해결책이 없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우리 정부에게 우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 달라는, 함께 힘을 모은 외침이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내심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말을 들어줄 거라고. 지금 우리가 외치고 있는 이 구호를, 이 거부 의사를 청와대에서도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런 내 마음이 너무도 순진한 것이었으며, 정부는 정작 이 얘기를 하나도 주의 깊게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의 마음은 분노로 변했다. 단지 '우리 얘기를 좀 들어달라'고 말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을 '불법 시위자'로 몰고, 대중의 분노를 축소시키고 폄하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눈에 생생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만 명이 운집한 광장의 사진을 두고 '경찰 추산 3만 명'이라는 왜곡된 숫자를 적어 넣는 언론에 대한 혐오도 생겼다. (2006년 월드컵 거리응원 때는 동일한 장소에 동일하게 빼곡히 모인 사람을 똑같은 구도로 찍어 넣고 '100만 인파 운집'이라고 써 재꼈던 바로 그 언론들이었다).


5월 한 달 동안 나는 반복해서 집회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두 번 나섰을 때에도 바뀌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순진하고 열정적이었던 나는, 이러한 집회를 본 집권자라면 어떤 형태로든 피드백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단지 우리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듯한 '액션'이었다. '국민 여러분의 뜻을 잘 알겠다.'는 단 한 마디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끝까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날이 거세지는 집회에 진정성 있는 답을 주는 대신 '명박산성'을 쌓아 대중과의 철저한 소통 단절을 시도했다. 전경을 무장시키고, 물대포를 등장시켜 켰다. 무력 진압을 시도했으며, 집회에 휘말린 죄 없는 시민 - 단지 '집에 가야 하는데 왜 길을 막느냐'라고 항의하던 - 에 달려들어 연행 버스에 태웠다.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외치고 있는 시민들을, 흉악 범죄자 집단 취급했다. 전경의 수를 점점 더 늘렸다. 프락치를 심었다. 길을 막고, 사람들을 검문하고, 잡아갔다.


당시의 나는 끝없이 분노했다. 매번 열리는 집회에 지속적으로 참여했으며,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 친구들에게도 현장의 상황을 알리려 애썼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집회에 갈 수 없는 날에는, 아프리카 TV로 중계되는 현장 생방송을 보며 현장에 나가 있는 친구에게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했다. 전경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디를 봉쇄하고 있는지. 토끼몰이를 당하듯 몰이당하고 있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 밤을 새우기도 했다. 결국 그러다 한 번은 친구가 연행되어 경찰서에 면회를 가기도 했다.


한 번은 새벽까지 남아있다가 물대포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도록 사용하게 되어 있는 물대포 사용 규정을 어기고, 옹기종기 스크럼을 짜고 서 있는 시민들을 향해 직선으로 내리 꽂히던 물대포. 맞는 순간 볼이 찢어질 것 같고, 숨을 쉴 수 없던 그 느낌. 물대포를 맞고 난 뒤 잠시 몸을 말리러 뒤에서 삼삼오오 모여 불을 피우고 젖은 몸을 말리던 시민들 사이에 서서 한탄 어린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어떤 아저씨가 전경버스 위에 올라갔다가 물대포를 10m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직격으로 맞고, 눈의 핏줄이 전부 터져 구급차로 실려나가는 것을 보며, 추워서 몸이 떨리는 건지 분노로 떨리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몸을 덜덜 떨었다.


우리는 단지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게 그의 대답이었다.

수없이 촛불을 들었지만, 그는 살수차를 쏟아부어 촛불을 다 꺼버렸다. 언론을 통제하고 왜곡하여 아무도 그의 전횡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껍데기는 가라


이번 촛불집회에서 친구와 나는 8년 전에 비해 유독 차분해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8년 전처럼 정부의 결정을 뒤집는 것이 아니었다. 15년 전의 나처럼,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 대한 순수한 분노와 추모를 주한 미군 철수 시위로 비약하려 했던 정치 공작에 휘말린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충분히 현실적인 목표를 지향하며, 오로지 차분한 가운데 우리의 분노와 의사를 이 세상에 분명히 표시하기 위해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어야 했던 것뿐이었다.


지난 반복된 집회 참여의 경험은 나를 냉정하게 만들어 주었다. 최초로 진행되는 대규모 집회에 운집한 인원수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아직 그 순수성이 훼손되지 않고, 전문 시위꾼들이나 프락치들이 활약하기 힘든 '첫 번째 대규모 시위'가 이번 정국의 분수령이 될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오랜 친구를 설득하여 이번 한 번만 다시 그곳으로 가기로 했던 것이다.


이번의 우리는 마치 투표를 하듯, 한 표를 보태는 심정으로 광장에 나갔다.

비록 나의 분노가 까마득한 그들에게 직접 가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들이 집계할 분노한 군중의 수에 기꺼이 내 머리 하나를 포함시킴으로써 나의 뜻을 전달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작은 생선들이 떼로 모여 커다란 고래처럼 헤엄치는 것처럼, 일개 작은 생선들의 분노를 거대한 고래와 같은 분노로 느끼게끔 그들을 착각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사실 나는 이번 시위에 나간다고 해서 뭔가 바뀔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일단 2008년, 아무리 외쳐도 '응답'하지 않는 대통령에 실망하며 모든 희망을 버려버리기도 했지만. 모든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 까마득한 위에 앉은 그녀가 대중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리가 없으니. (지지율 14%면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고 봐야 함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리도, 탄핵을 당할 리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시각,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내 마음 한 구석에 아주 작게나마 남아있던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희망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10월 29일 오후 6시, 나는 그냥 그곳에 있고 싶었다. 다른 어떤 곳도 아닌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누군가는 나의 마음과 의지를 알아줄 것이기에.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정당당한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해 나 또한 정정당당히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에.


이제 나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자리에 나간다고 해서 뭔가가 달라질 거라고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것이라고는.

그래도 아직은 나는 광장에 있고 싶다.

아무 말도 외치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어떤 개미만한 영향도 끼칠 수 없더라도, 그저 나의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광장의 한 사람으로 있고 싶다. 역사 속 부당한 일 앞에서, 침묵하지는 않는 한 사람이고 싶기에.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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