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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an 03. 2017

다녀왔습니다.

그저 당신이 너무 그립습니다.


 새해 첫 일정으로 봉하마을 참배를 선택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 함께 열성적으로 참여하던 친구와 함께 봉하마을에 가기로 약속을 했던 적이 있다. 그 때 그 분은 아직 살아계셨고, '노간지'라는 별명을 얻은 채 고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그 분은 봉하마을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을 위해 기꺼이 인사하러 나오는 '대통령 아저씨'였다. 우리는 그냥 그 분을 한 번 뵙고 싶었다. 가까이 가서 말 한마디 건네기는 어렵더라도, 그냥 그 분을 뵈면서 상처받았던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다. 단지 내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종교인들이 절망적인 순간 종교에 의지하여 이겨내듯, MB정부의 불통에 절망한 나에게 그는 마치 종교적 절대자같은 희망이고 위로였다. 당시의 내게 봉하마을은 최후의 보루이자 내 마음 속 아련한 피난처였는지도 모른다.


 얼마 후 나는 이탈리아로, 호주로 떠났다. 어학연수든, 워킹 홀리데이든, 그 구체적인 사유와 관계 없이 오직 MB 치하의 대한민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선택했던 길이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나면서도, 돌아오면 다시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난 그 분을 내버려두었다.


 바보같이, 그 때 만약 그 봉하마을을 가고 싶다던 그 마음을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이 비단 1년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것이 그토록 귀했던 기회인 줄 알았더라면...  

 결국 머나먼 호주에서 그의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저미는 미안함. 내 일부가 떨어져나간 듯한 충격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야 할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였는데...


 보수와 기독교 세력들이 장악한 호주 한국 교민 사회에서는 그 분을 위한 추모 공간 하나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브리즈번 한인회에서는 한인회장 선거 때문에 정신 없었고, 기독교 단체에서는 '종교적 이유' 때문에 그 분의 분향소를 마련할 수 없다고 했다. 억울하고 화가 나는 가운데, 어떤 뜻 있는 교민 한 분이 원불교 법당을 빌려 어렵게 분향소를 마련해 주셨다. 나는 아침 일찍 버스타고 2시간 걸리는,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곳의 분향소를 찾아가 그의 영정에 향을 올렸다.


 믿겨지지 않았다. 이렇게 초라하고, 외진 분향소에서 그 분을 추모해야 한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고 분했다. 나는 그의 영정에 향을 올리고 엎드리며 다짐했다. "한국에 가면 꼭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마지막 인사를 드릴게요." 하고.

 일 때문에 항상 맞춰 입어야 했던 검은 상하의는 그 때부터 나의 상복이 되었다. 나는 타국 땅에서 검은 옷을 입고 일할 때마다 그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17년 1월 1일에서야 나는 비로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봉하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햇살이 날 반겨주었다. 우연히 들어간 포차에서 만난 그 분의 누님과 조카분의 얼굴에서 그 분의 얼굴을 보고 울컥했다. 당일 아침 제사를 지내고 포차에 오셨다 했다. 우리는 그 포차의 몇 안되는 테이블 중 한 구석을 차지한 낯선 젊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분들은 우리를 무척 반가워하셨다. 비좁은 테이블에서 막걸리와 두부김치를 나누며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그 분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조카분은 삼촌인 그 분을 굉장히 존경했다. 누님은 그 분에 대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어릴 적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다. 그 외에도 현 시국과 관련하여 한참을 대화를 나누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우리는 이 날, 이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한 동지애를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이 포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해서 느끼는 동질감은 아니었다. 이 날, 이 마을에 찾아온.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나이든 몸을 이끌고, 각자의 사정을 뒤로 한 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이 곳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관대한 마음이 되었다. 같은 아픔과 안타까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 곳은 마치 어떤 특별하고 편안한 치유의 공동체 같았다.



 마침내 선 그의 비석 앞. 영화로, 사진으로 봐 왔던 그의 비석 앞에서 나는 익숙한 문구를 마주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

 '미안합니다. 고마웠습니다. 사랑했습니다.다신 이런 나라에 태어나지 마세요. 편히 잠드세요...' 그가 남기라던 '작은 비석' 앞에 서서 묵념을 하는 내 마음 속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갔던 것 같다. 어떤 말을 떠올리든 가슴을 꽉 메우는 진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다가 떠날 때까지, 봉하마을의 날씨는 봄날처럼 한결같이 포근했다. 포차에서 만난 그 분의 조카분은, 그 분의 마음이 이렇다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방문객 모두를 감싸안는 그 분의 마음이라고. 나는 결국 울고 말았다.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 이적, <걱정말아요 그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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