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 LEAGACY LIVES ON.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콘텐츠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델리 크라임’를 보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델리 크라임'은 2012년에 일어난 델리 여대생 버스 집단 성폭행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시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끔찍한 사건을 소재로 한 드라마인지라 어떻게 그려냈을지 조금 우려스러웠지만,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문제의 범죄 장면은 한 번도 묘사되지 않는다.
이 시리즈를 만들기로 결심한 제작자가 사전에 실제 피해자인 조티 싱의 부모에게 제작 취지를 설명하고 허락을 구했다고 한다. 자극적인 장면이 들어갔다면 자칫 본질을 흐릴 수도 있었을 텐데, 매우 현명한 결단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그 장면이 없더라도, 범죄의 끔찍함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실제 사건에서는 범죄 발생 이후 24시간 내에 범인을 모두 잡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극의 재미를 위해서인지 분량 및 완급 조절을 위해서인지 범행 발생 후 일주일간 범인들을 잡는 것으로 각색하여 그 과정을 보여준다.
CSI나, 우리나라의 최첨단 특수 수사물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 ‘델리 크라임’은 뭐랄까, 신선하게 충격적이었다. 작품 배경이 2012년인 것을 고려해봐도, 그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 수사도구 등 모든 것이 열악하여 놀라울 정도였다. 몇 가지를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범죄인 인도 시에 수갑이나 포승줄을 사용하지 않는다. 손깍지(...)를 끼고 다정하게(?) 이송한다. 실제 범인을 이송하는 모습을 보니 손깍지 끼고 있더라. 나름대로 고도의 고증이었다.
2. 인도는 우리나라처럼 누구나 만 18세가 되면 주민등록증 받겠다고 주민센터 가서 자발적으로 지문과 신원을 등록하는 나라가 아니다. 미등록된 인구가 너무 많다 보니 전산 상의 신원조회는 어렵다. 때문에 용의자 수사, 추적은 철저히 탐문수사로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친구나 인맥도 동원하고, 마을 소식통도 동원하고, 구걸하는 아이를 정보원으로 심기 위해 환심을 사려 노력하기도 한다. 땅덩어리는 또 얼마나 넓은지, 제보 들어오면 5시간 운전은 기본에 위험지역에라도 가면 지역 경찰의 호위를 받아 움직여야 할 정도. 정말 눈물겹다.
3. 전화가 없는 사람이 많다. 1인 1 폰, 경우에 따라서는 2 폰이 보급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4. 경찰 수사에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다름 아닌 ‘정의감에 넘쳐 이성을 잃고 분노한 군중’이다. 이들에게 잡히면 범인들은 맞아 죽고, 범행의 증거인 버스가 이들 손에 넘어갔다가는 불타버려서 증거가 훼손되어 버릴 수 있다.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이송하는 과정에서도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군중에게 이들이 범인이라는 것을 들켜서 공격의 표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범죄자들을 경찰서에 데려갈 때도, ‘네가 잠자코 우리 따라 조사하러 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너를 잡아 죽일걸? 우린 너를 보호하려는 거야’라는 논리로 설득하고 손깍지(...)를 끼고 데려간다.
이런 기상천외한 환경에서 24시간 내에 범인을 모두 잡았다니 오히려 인도 경찰들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실제 사건에서는 단순히 ‘생존자’로 보고되었고, 이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피해자의 남성 친구 역할이 ‘피해자 디피카의 삶에 짐승들을 끌어들인 원흉’이자 ‘수사를 방해하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범인들은 슬럼가에서 못 배우고 자란 하류층이라는 일말의 '피해 갈' 포인트라도 마련해주는데, 이 사람은 변명이나 쉴드의 여지없이 '나쁜 놈 or 뭔가 구린 놈'으로 묘사되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이 부분이 궁금해서 드라마를 다 보고 난 후 ‘인도의 딸’이라는 다큐도 찾아보고, 실제로 실존인물인 아윈드라가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 도 유튜브에서 찾아봤는데, 댓글을 보니 나처럼 ‘델리 크라임’을 보고 궁금해서 인터뷰를 보러 온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해당 영상을 보고 나서 느낀 점은, 이 드라마에서 몰아가는 대로, 아윈드라가 만악의 근원처럼 보이진 않았다는 것이다.
좀 더 찾아보니 ‘델리 크라임’은 애초에 인도 경찰의 입장이 기본이 되어 만들어진 시리즈인지라 기본적으로 당시 인도 경찰의 상황과 입장을 변호하는 논리를 갖추고 있음을 감안하고 시청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로 드라마의 초점이 상당 부분 인도 경찰 시스템의 낙후된 현실과 현실적 고충에 맞춰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드라마 상황상, 당시 경찰의 부적절한 수사에 대해 조사를 받고 있던 경찰의 입장에서 ‘경찰의 초기 조치에 문제가 있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아윈드라가 밉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 사건에서는 드라마에 묘사된 것처럼 아윈드라가 조티 싱의 남자 친구라거나, 버스 안에서 진한 스킨십을 해서 범인들을 자극했다거나, 수상할 정도로 덜 다쳤다 하는 공식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때문에 실제 이 인물의 모델인 아윈드라가 이 드라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드라마는 범인을 모두 검거한 뒤, 그동안 고생한 경찰들이 인디아 게이트에 모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자축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현실의 조티 싱은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델리 크라임’ 속 디피카는 아직 살아있고, 곧 또 수술을 앞두고 있는 참이다. 디피카 또래의 여경 니티는 부청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디피카, 그리고 조티 싱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가 살아남고, 회복하고, 마침내 극복하여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의 삶을 좀 더 영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지막화까지 시청한 시청자들은 모두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비록 그녀는 안타깝게 이 세상을 등졌지만, 그녀가 남긴 여파는 지속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인도에는 새로운 강간 방지법이 개정됐고, 강간범들에 대한 처벌 강화, 성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신속 처리 법정이 도입됐다. 더 이상 인도 여성들이 납치 및 강간의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될 그 날이 올 때까지, 매년 12월 16일이면 인도인들은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정의를 외치며 조티 싱의 다른 이름이자 ‘두려움 없는 자’라는 뜻인 Nirbhaya를 기억할 것이다.
1. ‘델리 크라임’은 넷플릭스와 두 개의 시즌을 계약했다고 한다. 두 번째 시즌이 나올 때도 아마 챙겨 볼 것 같다.
2. 이 드라마를 다 본 후, '인도의 딸'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같이 보면 좋다. 단, 보고 나면 극도의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 있으므로 주의. 범인과 범인 가족, 범인 변호인들의 대환장 파티가 벌어진다. 이 영화는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춰 개봉 예정이었으나, 인도 법원에 의해 인도 내 상영이 금지됐으며 그래서 인도인들은 다시 한번 분노했다고 한다.
자막 없는 버전 (단, 힌디어로 대화하는 부분에선 영문 자막이 나옴)
http://watchdocumentaries.com/indias-daughter/
3. 드라마 속 대사는 영어와 힌디어로 진행이 되는데,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최소 바이링구얼일 수밖에 없는 문화권만의 경이로움이 있다. 힌디어로 말을 하다가 영어가 끼어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영어는 ‘외래어’ 일 수밖에 없는 우리 문화권과는 좀 다른 부분이다. 물론 전형적인 인도식 영어지만, 그래도 생활 속에서 저렇게 자연스럽게 영어를 쓰는 모습이 멋지게 보였다. 범인들에게 재판은 영어로 받고 싶은지, 힌디어로 받고 싶은지 물어보고 싶은지 물어보기도 한다. 단, 이 드라마에서도 상류층은 주로 영어를, 하류층은 힌디어를 쓰는 것으로 묘사되는 걸 봐서는 영어를 자연스럽게 쓴다는 건 어느 정도 교육 수준이 있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