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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Feb 20. 2016

움베르토 에코를 추억하다

마지막 순간 그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안녕을 고했을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잠도 채 깨지 않은 부스스한 모습으로 켠 스마트폰 화면에서 접한 첫 소식이 누군가의 부고인 것. 그것은 분명 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아예 드문 일도 아니다. 때문에 여태까지 나는 그런 경우에도 별다른 느낌을 느끼지 못했다. 뉴스가 눈에 들어온 한 순간, '또 어느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구나' 하는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혀 짧은 애도를 하다가도, 이내 다시 일어나 보통의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스마트폰을 켜서 접한 첫 화면에서 발견한 뉴스를 보고서 나는 잠시 멍해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메시지가 함께 적혀 있는 흑백 사진 속에 보이는 얼굴은 분명, 익숙한 얼굴이었다.



움베르토 에코, 당신이 가다니.



움베르토 에코, 그 이름을 확인한 뒤 또 한 번 멍해졌다. 텅 빈 머릿속에,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장미의 이름』을 읽고 좌절했던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수업시간,  액자식 구성을 가진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함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선생님은 혹시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고, 당시 동급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녀는 그 책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고 했다. 그 순간, 선생님의 눈에 반짝, 하고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


"『장미의 이름』을 벌써 읽었다고? 대단한데?"


선생님은 재밌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평소에 도통 웃는 법이 없는 뚱한 인상의 선생님의 표정에서 순간 내가 본 것은 정말 순수한 의미의 반가움이었다. 나는 그 순간 화르륵, 하는 질투심에 휩싸였다. '대체 그 책이 뭔데?' 괜히  뾰로통해진 나는 그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당장 학교 도서관으로 달려가 『장미의 이름』을 빌렸다.


그렇게 집어 든 책이었으나, 읽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역사적, 장소적 배경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가 나누는 복잡한 대화였다. 고도의 지적 유희를 염두에 둔, 온갖 어려운 기호학적 대화로 점철된 책 앞에서 나는 생애 첫 좌절을 느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책이든 읽으면서 그렇게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던 탓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을 읽으면서 책에 대한 나만의 '사전'을 만들어 마치 공부하듯이 책을 읽어 나갔다. 노트 하나를 옆에 끼고 등장인물과 나이, 특징을 일일이 기록해 가며, 막판에는 거의 어떻게든 텍스트라도 다 읽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다 읽고 난 후에 나는 유독 극심히 좌절했다. 두 번 정도 읽고 난 후에는 그나마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추리 소설로서의 재미라도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 뭔가 계속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근본적으로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 책이 숨겨 놓은 지적 유희적 장치들을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이 책을 거듭 읽는다 해도 어떤 의미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었음에도 어디 가서 '이 책을 읽었다'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수업 시간에 자신 있게 이 책을 읽었다고 손을 들었던 동급생 친구에게는 이제 더 이상 질투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이해했다는 생각에, 그녀에 대한 경쟁심은 사그라들고 대신 '정말 대단하다'는 경외감으로 가득 찼달까.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솔직히 말했다. 나 또한 『장미의 이름』을 읽었노라고. 그러나 나는 그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 그녀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맞아, 『장미의 이름』은 좀 어려운 편이야. 그래도 그걸 읽었으면 움베르토 에코 다른 책들은 좀 쉬울 거야."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도서관에 가서 다시 움베르토 에코의 다른 책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날 내 손에  들어온 책이, 바로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었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그와 사랑에 빠지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즉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와 『장미의 이름』의 저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장미의 이름』을 읽었을 때 느꼈던 그에 대한 이미지가 내가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인텔리 꼰대 아저씨 같았다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속의 그는 마치 동네 술집에서 신문을 보며 '이거 정말 말도  안 되지 않소?'하고 옆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동네 아저씨 같았달까.


이 책은 내내 시종일관 비아냥 거리는 어투로 똘똘 뭉친 어조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뭐라 한 마디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시니컬함 안에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애정 때문이리라.  


천재인 그의 입장에서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 같아 보였겠는가. 때로는 그와 같은 어리석음 앞에 자신이 앞장서서 진지하게 화를 내며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오히려 불필요하게 느껴질 것이다.(어차피 못 알아들을 테니까.)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수준이 맞지 않는 보통 존재들의 어리석은 일들에 대해 그냥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에너지를 아껴 보다 생산적인 일에 투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하나하나의 어리석은 일들에 침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웃으면서 화를 내 보는' 것이었다.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선에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그 나름의 애정 어린 시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담론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악의나 잔혹함에 분개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없지만,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뭐랄까, 시종일관 투덜거리는  말투뿐이지만, 그도 역시 결국에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애정을 품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츤데레 같은 느낌이 좀 나긴 하지만.)


나는 이 책 안에 드러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인간성에 매료되었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가 아무리 어려운 책을 써도,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 책을 접한 이후, 나는 에코의 책이라면 무조건 한 번 도전해 보게 되었다. 그의 책이라면 어떤 것이든 나에게 한 톨 어치의 실망감도 안겨주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던 것이다. 처음 그를 만난 열일곱부터, 무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서점에서 기다려 구매하곤 했는데.


그런 그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는 것.

오늘부터 그가 세상에 없다는 것.

이제 세상의 그의 신간이 나올 일이 없다는 것.

서점에서 그에 대한 나의 한결같은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검증해 보는 재미가 사라진다는 것.


이제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가 내 인생에 주는 두근거림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슬프다.


조금 더, 그가 어리석은 우리에게 웃으면서 화를 내어주었으면 했는데.



마지막 순간, 그는 세상의 바보들을 보며 미소 지었을까.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 그가 지었을 표정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미소라면, 그 또한 세상의 바보들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애정이 담긴 미소가 아니었을까.


나의 젊은 시절,  첫 좌절을 안겨준 소중한 도전이자 동경이었던 그.

오늘 하루만큼은, 온전히 그를 추억하고 싶다.


그의 영면이 더 없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Resta in pace, e arrivederci.





언젠가는 내가 사랑하는 배우들과 작가들이 모두 이렇게 떠나겠지.
알 파치노, 아멜리 노통브, 폴 오스터와도 작별을 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나이 든다는 것은 이렇게
모든 익숙한 존재들을 내 삶에서 먼저 떠나보내는 과정일 테니.

Cover Image : Umberto Eco for PIFAL by Arturo Espin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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