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신인류의 사랑
‘담다디’라는 노래로 유명했던 이상은이라는 가수가 있었다. 내 친구 현은 그녀의 열혈 펜이었다. 책받침이며, 필통, 지갑 등 현의 모든 물건은 이상은의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이번에는 지방에서 콘서트를 할 거래. 지방까지 가기는 힘들겠지? 너무 가고 싶은데~”
현은 애가 타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나의 흥미를 끈 건 선머슴 같은 이상은 보다 현의 얼굴이었다. 현이 조잘대는 동안 나는 그 애의 하얗고 고운 피부와 크고 쌍꺼풀 진 눈을 보고, 오뚝하게 솟은 코랑 기다란 목덜미를 보았다.
“현아, 그런데 너희 조상 중에 외국 사람이 있었어?”
이상은과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에 현은 눈을 살짝 흘겼다.
“내 얘기 하나도 안 듣고 있구나. 갑자기 웬 조상타령이야.”
“아니, 넌 진짜 서구적으로 생겼잖아. 아사아인의 족보로는 나올 수 없는 얼굴이라고.”
그랬다. 현은 혼혈아가 아닐까 싶을 만큼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컴퓨터 미인으로 유명했던 탤런트 황신혜와 비슷한 이목구비였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현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그 애를 좋아하는 남학생은 한 명도 없었고, 같은 반 여자애들도 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는... 현이 옷을 너무나 못 입었기 때문이었다. 칙칙한 국방색 점퍼에 무릎이 한껏 발사된 낡은 청바지, 한 번도 안 빨았을 것 같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헤어스타일도 한몫했다. 고운 얼굴과는 달리 그 애의 머리카락은 아주 굵고 거칠어서 꽁꽁 묶어놔야 했는데 한올도 남기지 않고 뒤로 끌어모아 묶어 논 꼬랑지가 마치 당나귀 꼬랑지처럼 거칠어 보였다.
결정적으로, 까만색의 커다란 잠자리 안경은 너드미(Nerd美)가 아닌 진정 괴짜 이미지를 풍기게 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숨기기 위해 눈썹을 밀고 누추한 옷을 입고 다녔던 고전소설의 ‘테스’처럼, 현은 이렇게 자기의 미를 철저히 숨기고 다녔다. 물론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고, 꾸미기에 관심이 없었을 뿐. 그래서, 현이 사실은 엄청난 미인이라는 건 친구인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랬던 현의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진 건 직장인이 되고 부터였다.
"어디 가. 나 여기 있는데."
아주 오랜만에 현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익숙한 친구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싱그러운 연둣빛 나무 아래에서 연예인인가 싶게 예쁜 여자가 나한테 손짓하고 있었다. 현이었다.
"너 아닌 줄 알았어. 왜 이렇게 예뻐졌어?"
현을 마지막으로 본 게 1년 여 전, 그때만 해도 여전히 안경테에 꽁지머리 여자애였는데 그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헤어스타일이었다. 매직파마를 했는지 머릿결이 비단결이 되어 움직일 때마다 우아하게 찰랑거렸다. 그녀의 얼굴을 가렸던 커다란 잠자리 안경까지 벗으니 원래의 화려한 이목구비가 드디어 드러났고, 옅게 한 화장은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패션테러리스트 현은 어디 간 거야~ 옷도 예쁘게 입었네.”
황홀한 얼굴로 그녀의 위아래를 바쁘게 훑어보았다. 몸에 붙는 하늘색 티셔츠로 드러난 가느다란 허리와 미니 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긴 다리는, 친구인 나마저 얘가 이렇게 늘씬했나 싶을 만큼 아찔했다.
현과 나란히 종로길을 걷는데 사방에서 시선이 날아왔다. 매혹당한 사람들의 시선은 온전히 현의 것이었다. 현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이 봄바람을 타고 사람들한테 흘러가기라도 한 듯 어디를 가나 시선이 따라붙었다.
어떤 늙수그레한 아저씨들은 노골적으로 현의 가슴과 허리, 다리를 훑어 내리고는 했다. 으르렁 거리는 개와 같은 눈빛으로 나는 그런 아저씨들을 노려보았다. 정작 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한 표정이었는데도.
"현아, 쳐다보는 저 아저씨 너무 싫지 않니?"
현은 내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아름다움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종로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나이트 호객꾼, 일명 삐끼들이 마구 몰려들었다.
"그냥 놀면 돼요. 돈 안내도 돼."
"아니요. 저희 갈 데가 있어요."
안 간다는데도 우리의 팔을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다. 좀 더 강한 표현이 필요하다 싶어 나는 흡사 연예인을 대동한 매니저 마냥 한 팔로는 현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팔로는 크게 휘두르며 그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한 명이 물러가면, 또 다른 한 명이 따라붙는 식이어서 종로 나이트 거리를 벗어나는데 한참이 걸려야 했다.
밥을 먹고 집에 가는 길, 사야 할 책이 있어 영풍문고를 들렸다. 원하는 책을 고르고 현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데 저쪽 구석에서 어떤 남자가 현 앞에서 쭈뼛거리는 모습으로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아, 이 분이 차 한잔 하자고..."
현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예상치 못한 나의 등장에 당황한 남자는 귀까지 빨개졌다.
"저희 어디 좀 가봐야 해서요."
낚아채듯 현의 손을 잡고 급히 서점을 빠져나왔다. 그날이 시작이었다. 현을 만날 때마다 달려드는 남자들을 마치 날파리 쫓듯 훠이훠이 쫓아내는 일이 꼭 한 번씩은 생기곤 했다.
현의 꿈은 이상은 같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알던 그녀의 꿈은 가수는 아니었는데, 주변에서 연예인 해보라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되자 자연스레 가수를 꿈꾸게 된 것 같았다. 현은 어느 날 오디션이 있다며 함께 가달라고 했다. 신촌의 유명 쇼핑몰 앞에 만들어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거기에서 방송 관계자의 눈에 들면 다음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모양이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무대 앞에 몰려 있었다. 나는 신중하게 현의 메이크업을 봐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
"현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옷이 더 화려해야 할 것 같아."
짧은 치마를 잘도 입고 다니던 애가 그날따라 펑퍼짐한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현의 길고 쭉 벋은 다리가 드러나면 플러스가 될 것 같았다. 나는 허둥지둥 신촌의 옷가게를 뒤져 핑크색 미니스커트를 사들고 와 갈아입게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현의 차례, 무대에 오른 현은 애써 웃는 듯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번쩍번쩍 뿜어대는 조명 속, 담다디가 흐르자 현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 담~” 현이 이상은처럼 다리를 들어 올릴 때마다 핑크색 미니스커트가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얼굴이 너무 길지 않아?"
미니스커트를 괜히 입혔나 중얼거리며 무대에 집중하고 있는데 내 뒤에 서있던 여자들이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무대 옆에 설치된 모니터 화면을 보았다. 현은 얼굴이 살짝, 아주 조금 긴 편이었다. 그런데 화면 속 그녀의 얼굴은 말상처럼 길디 긴 얼굴이었다. 너무 할 정도였다. 분명 현인데, 현 같지 않은 현이 화면 속에 있었다.
그랬다. 현은 카메라가 너무나 안 받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오디션에서 떨어진 후 현은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잠깐만 놀다 가요."
신촌 거리를 걷는데 또 삐끼들이 놀다만 가라며 눈치 없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아니요"를 외치며 손을 저으려는데 현이 내 손목을 딱 잡았다.
"나 오늘 놀다 가고 싶어."
똥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자 현은 한술 더 떴다.
“먼저 집에 갈래? 혼자 있고 싶어서…”
얼떨떨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황망히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속상한 마음을 풀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 장소가 나이트라는 게 의외였다. 처음에는 '괜찮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는 '현이 나이트를 혼자서도 갈 수 있구나' 싶어 조금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으로, '왜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을까' 궁금증이 들었다.
어쩐지 섭섭한 마음으로 잘 준비를 하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갑자기 귀에 꽂혔다. O15B의 '신인류의 사랑'이었다.
거리에서 본 괜찮은 여자에게 말을 걸어보면
항상 제일 못 생긴 친구가 훼방을 놓지
나도 이제 다른 친구들처럼
맘에 드는 누군가를 사귀어 보고 싶어
“아…”
갑자기 내가 했던 행동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현에게 말을 걸려던 남자들 앞에서 정색을 하고 손사래를 치던 나의 모습, 현을 쳐다보기만 해도 어서 그 눈 저리 치우라는 표정으로 상대를 째려보던 나의 모습.
노래 가사 속의 항상 제일 못 생긴 친구가 훼방을 놓는 딱 그 모습 아닌가.
대체 나는 왜 그토록 현을 보호하려고 했던 걸까. 그 애는 단 한 번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문득 서점에서 친구에게 시간을 조금 내달라던, 수줍은 표정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좋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현은 내가 얼마나 불편했으면 혼자 나이트를 갈 생각까지 했을까.
그렇게 매니저 노릇을 자청하는 동안 한 번도 현의 생각을 물어보지 않았는지 이제 와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내가 창피해져서 문 뒤에 숨고만 싶었다.
거짓말처럼, 농담처럼, 현은 그날 밤 나이트에서 한 오빠를 만났고, 그 오빠와 연인이 되었다. 둘이 만난 장소가 나이트였을 뿐이지, 둘은 지고지순 한결같은 사랑으로 5년을 채우고 결혼했다. 그 5년 중 3년은 현이 군대에 간 오빠를 꼬박 기다린 시간이었다. 수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그야말로 '고무신' 한번 거꾸로 신지 않는 현을 보고, 나는 20세기 마지막 열녀문은 너를 위해 세워야 한다고 농담조로 말하고는 했다.
결혼식날 웨딩드레스를 입은 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현은 빼도 박도 못하게 그녀를 꼭 닮은 예쁜 딸 둘을 낳아 아주 잘 살고 있다.
내가 평생 잘한 일 중 하나가 있다면 그날밤 현을 신촌에 두고 혼자 온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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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마음에 마음을 더하는 귀한 만남을 더 가져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제 인생에 느낌표와 물음표를 남겨 준 10명의 인연들에게 안부와 사랑을 전합니다.감사합니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