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의 키는 175 정도 되어 보인다. 웬만한 여자애들 사이에서 머리 하나가 더 있어 언제나 눈에 띄었다. 동그란 얼굴에 볼 빵빵, 쇼트커트에 샛노랗게 염색한 헤어스타일이로, 멀리서 보면 둥실 떠오른 보름달이 연상되고는 했다. 키만 커서 튀는 건 아니었다. 체격 또한 좋았다. 넓고 딱 벌어진 어깨에, 굵고 튼튼해 보이는 허리와 허벅지가 남달랐다. 취미가 역도라고 해도 순순히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비단 키와 체격 때문에 돋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패션 감각은 독보적인 데가 있었다. 아니, 독창적이라고 해야 하나. 트렌드를 쫓아가면서도 강한 개성이 묻어났다.
NY를 처음 봤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녀는 편입생으로 2학년 1학기 전공수업 때 처음 나타났다. 수업시간에 늦었는데도, 뒷문이 아닌 앞문으로 당당하게 그녀가 들어온 순간, 교수님과 학생들은 순간 ‘헙’하고 숨을 멈추었다. 화이트 정장 슈트 차림이었는데, 재킷의 어깨 패드가 아주 화끈하게, 럭비선수 유니폼 못지않게 거대해서 로봇 태권브이 어깨에 뒤지지 않을 만했다. 그리고 허리에 손바닥만큼 넓은 빨간색 벨트를 차서 굵은 허리둘레를 더욱 강조해 주었다. 원래 큰 사람이 위아래로 하얗게 입으니 더 커 보여서 마치 도복을 입은 거대한 호빵맨이 분한 듯했다.
화장도 옷만큼이나 과했다. 긴 손눈썹을 붙이고, 저렇게까지 진하게 할 필요가 있을 만큼 아이섀도도 립스틱도 진하게 발랐다. 강렬한 첫 등장 이후로, NY는 샛노란 슈트를 입거나, 야광색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교정을 거니는 모습이 목격되고는 했다. 옷들은 모두 미래시대를 연상시키는 구조적인 형태였고, 두 배는 팽창시켜 보이는 원색이었다. 허리는 항상, 반드시, 기필코 벨트나 끈으로 졸라맸다. 남학우들은 “위아래 구분은 꼭 해줘야 하나보다”고 키득거렸다. 그랬다. 그녀는 학교 대표 패션 테러리스트로 단숨에 등극했다. 전교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그녀가 내 앞에 앉았는데, 그날은 비닐로 만든 상의에 힙합바지를 입고 있었다. 당시, 박진영이 가요 차트를 휩쓸던 시기였는데, 비닐 바지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패션을 오마주한 듯했다. 차마, 비닐 바지는 입을 수 없어서 상의로 대신했던 걸까. 7월 초의 무더운 여름이었고, 비닐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걸 나는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 입고 다니냐고 진심으로 묻고 싶었으나 어쩐지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녀에게 말 걸기가 어려운 건 나뿐만은 아닌 듯, 그녀는 언제나 혼자 다녔다. 나는 그녀가 친구를 만들고 싶으면 빨리 저 옷들을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름 패션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의 패션을 평가절하했다.
세트로 입고 싶으면 위아래 톤을 맞춰야지. 야, 색만 맞추면 안 되지, 위아래 원단 소재가 너무 충돌하잖아. 얘야, 포인트가 너무 많잖니, 포인트는 하나만 해야 의미가 있는 거라고.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광장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그녀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베이지색 리넨 블라우스에, 같은 베이지 리넨 쇼트팬츠를 입은 차림이었다. 그날도 뭔가로 허리를 졸라맸는데 동아줄 비슷해 보였고, 신발은 '영화 300'의 전사들이 신은 것과 같은, 무릎부터 발목까지 가죽끈이 교차된 샌들이었다. 이번에는 로마시대 전사를 오마주한 듯했다. 그녀의 옷차림도 놀라운데 더욱 놀라운 건 그녀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광장에 있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다. 전장을 앞둔 장수처럼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175 장신의 로마 여전사 기운에 난 압도되었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마침내 내 앞에 선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안녕. 나 알지?"
“어… 우리 과잖아."
그녀는 나한테 입고 있는 옷이 예쁘다고 했다. 당시 나는 어깨선과 허리 다트선 시접이 바깥으로 보이게 디자인이 된 재킷을 입고 있었다. 길을 가다 보면 사람들이 쫓아와서 작은 목소리로 “옷 뒤집어 입으셨어요”라고 알려주고는 했지만 나는 괘념치 않았다. 이 디자인의 전위적인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안과 밖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해방된 의미가 담긴 거라고, 쯧쯧.
그런데 모두들 잘못 입은 거 아니냐고 묻던 옷을 그녀가 인정해 주자 기분이 묘해졌다.
나의 일그러진 표정을 눈치 채지 못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옷 어디서 사? 평소 눈여겨봤는데, 입고 다니는 옷들이 다 내 마음에 들더라. “
“정… 정말?”
이라고 말했지만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오 마이갓! 내 옷이 어떻게 네 맘에 들어?’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온 용건을 꺼냈다.
“옷 사러 같이 가지 않을래?”
두 패션 테러리스트의 운명과 같은 만남의 시작이었다.
20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NY는 빵빵했던 보름달 시절이 무색하게 말라깽이가 되었다. 그리고 혁신적이며 급진적인 미가 돋보이는 옷들을 홍대에서 팔고 있다.
당연히도, 나는 그녀의 가장 오랜 단골이다.
사진출처: o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