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잘 사주는 멋진 오빠
"그동안 수고 많이 했어. 이건 기특해서 주는 선물."
권 선배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학과 조교인 김 선배가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한다며 조교일을 그만두는 날, 그동안 수고했다며 나에게 선물을 내민 것이다. 수고했다는 선물은 내가 해야 하는데, 뒤바뀐 상황에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받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까만색 모토로라 삐삐가 있었다.
"삐삐네. 이거 비싸지 않아요?"
1995년, 삐삐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이라 학생 신분으로 사기에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안 받겠다는 걸, 권 선배는 "아는 형 통해서 헐값에 샀다."며 우격다짐으로 내 가방에 넣어버렸다.
1학년 2학기에 나는 용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학과 사무실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있었다. 학과장님 일을 돕다 보니 자연스레 조교인 권 선배와 함께 할 일이 많았다. 교수님 인솔하게 학술대회 일을 같이 진행하기도 하고, 학과의 여러 가지 자잘한 업무를 나눠 처리하기도 했다. 교수님과 함께 식사할 자리도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권 선배는 수고했다며 나를 따로 불러내 밥이며 커피를 사주었다.
후배들한테 밥, 커피를 무한 제공해 주는 선배들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뭐든 열심히 하는 내가 기특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삐삐를 선물했을 때는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나 싶었지만 그것에 관해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월을 겪으며 이제 눈치라고 할까, 사람관계의 미묘한 변화에 대해 빨리 포착하게 되었지만 스무 살의 나는 좀 둔한 편이었다.
친절하기만 했던 선배가 돌변한 것은 나의 연애설이 과내에 퍼진 뒤부터였다. 2학년이 된 나는 편집홍보팀을 맡게 되었는데 1학년 후배들을 팀원으로 받은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후배 녀석이 자꾸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한참 술잔이 오가는데 녀석이 갑자기 내 옆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재수해서 너랑 동갑이야.”
그래도 선배인데 다짜고짜 반말에 너라는 호칭까지, 똥그래진 눈으로 후배를 쳐다봤다.
"남자친구 있어?"
숨 쉴 틈 없이 바로 던지는 질문. 그의 기세에 눌려 나는 중얼거리듯 "없는데"라고 말했는데, 하마터면 "요"자를 붙일 뻔했다.
“그래? 잘 됐네.”
며칠 후 그 후배, 최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학로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 애의 당돌함에 호기심이 일어 일단 나가보자 라는 생각으로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혜화역이 가까워질수록 가슴 한켠이 조금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4월의 대학로는 벚꽃 길이었다.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나를 기다리는 최를 보고 아까의 울렁거림은 설렘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벚꽃길을 걷기로 했는데 최는 나를 길 안쪽으로 에스코트해주며 인파와 부딪치지 않도록 신경 써주었다. 돈가스를 먹을 때는 내 접시를 가져가더니 한 입 크기에 맞게 일일이 다 썰어주었다.
카리스마 넘치던 첫인상과는 달리, 깨지기 쉬운 구슬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나를 대하는 최가 단번에 좋아지고 말았다. 혜화에서 데이트 이후,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두어 번 같이 먹었을까. 동기로부터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젯밤에 권 선배한테 연락이 왔어. 네가 최랑 사귀는 거냐고 묻더라."
가깝게 지내던 여동기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 왜? 생각지도 못한 선배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동기는 "선배가 너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며 자기는 일단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렇구나, 어떻게 해야 할 지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다음날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들 몇 명이 권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며 비슷한 내용을 전했다. 구설수에 오른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당황스러운 마음에 빨리 집에 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날 오후,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나를 4학년 김 선배가 불러 세웠다. 그는 권 선배의 동기였다.
"권이 요즘 많이 힘든가 보더라."
"아, 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 앞에서 김 선배는 담배 한 개비를 말없이 피웠다. 마치 벌을 서는 기분이었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동그랗게 둘러 서서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나한테 하든지.' 권 선배를 한번 만나야겠다고는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진행되고 보니 그의 얼굴도 보기가 싫어졌다.
무엇보다 자기 일에 주변 사람들을 동원하는 행태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밤, 권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지만 화가 난 마음에 받지 않았다. 이미 내가 최한테 마음이 간 것은 소문으로 들었을 테고, 나의 거부가 답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뭐야?"
과사무실에서 팩스를 정리하던 나의 눈이 커졌다. 장문의 팩스 내용은 권 선배가 나한테 보내는 편지였다. 요약하면, 좋아하고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비록 내가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었다 해도 교수님이나 다른 선후배가 팩스를 받을 수도 있는데, 권 선배의 돌진에 이제는 화가 치밀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걸까. 아니면 이성을 잃은 걸까. 이해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권 선배의 일을 최에게 말해야 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해 며칠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고민 끝에 일단 최를 만나볼까 해서 연락을 했지만 답이 없었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권 선배의 동기들한테 최가 불려 갔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하이틴 로맨스 만화책도 아니고, 일련의 돌아가는 일이 너무 유치하고도 상식 밖이라 할 말을 잃었다. 권 선배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최한테 드는 섭섭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그 정도 일에 쉽게 마음을 정리하다니.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러기에 최와 나의 관계는 너무나 얕았다. 겨우 서너 번 만났을 뿐이다. '네가 그 정도였다면 나도'라는 마음으로 더 이상 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아팠다. 가파르게 차올랐다가 순식간에 빠져버린 첫사랑. 최와 걷던 벚꽃길이 자꾸 떠올랐다. 최에 대해 커지는 그리움만큼, 일을 이렇게 만든 권 선배에 대한 원망이 커져가던 어느 날이었다. 외출했다 돌아오던 길에 집 앞에 서있는 권 선배를 보고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왜 이래요. 선배. 빨리 일어나요."
당황한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키려고 했다.
"대답해줄 때까지 안 일어나."
굳세게 버티는 성인 남자의 힘을 이길 재간이 없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내 뜻을 전해주어야 하는 걸까.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얼굴에 꽂히는 것만 같았다.
"선배랑 만날 마음이 전혀 없으니 연락하지 말아요."
나의 분명한 거절에도 권 선배는 우리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엄마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동생들을 따로 만나기도 했다. 그는 부지런하고 목표가 있으면 최선을 다해 이루고 마는 강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반대로 나는 자연스운 것을 추구하고 무리를 동반하는 일은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끝과 끝,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이어서였을까. 권 선배의 집념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그의 신념이 보이는 것만 같았고 ‘내가 그걸 깨주마’라는 나대로의 고집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가 나의 의사를 받아들이는 데는 일 년이 넘게 걸렸다. 어느 순간부터 일방적인 연락도 편지도, 집에 찾아오는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리듯, 내 생일과 크리스마스 때마다 커다란 꽃바구니를 집 앞에 두고 갔다. 거의 5년을 그렇게 했다.
그 사이, 난 그가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몇 년 후 퇴사하고 사업을 차렸는데 금방 자리 잡고 성공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페이스북에 권 선배는 자신의 사진을 자주 올렸다. 고급 정장을 입고 있거나 골프채를 든 모습이었다. 마치 자신이 성공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아 페북을 탈퇴해 버렸다.
내가 페북을 끊은 사실을 알았는지 어느 날 권 선배는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 내 회사 위치를 알아냈다는 사실부터 이미 난 불쾌해져 버렸다. 그는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복을 입고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나는 그의 유난히 넓은 디자인의 실크 넥타이가 그처럼 과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난 이제 누구한테 밥 얻어먹는 거 안 해요. 선배한테 호되게 당해서."
선배와의 일로 과하게 호의를 베푸는 남자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분명하게 처신하지 못한 내 행동도 원인이었다는 생각에 지레 철벽을 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내 말에 선배는 화가 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선배와 나는 서로를 노려보다가, 난 곧 등을 돌려 택시를 타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세월과 함께 들려오는 소식 중에 권 선배가 결혼한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드디어 짝을 찾았구나. 부인한테 잘해줄 사람이야. 담담히 그의 행복을 빌었다. 그렇게 일이 년이 흘렀을까, 회사에서 야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분명하게 발음하면서도 묘하게 끄는 말투, 권 선배였다. 몇 년만의 전화였지만 단번에 그인지 알 수 있었다.
"아, 네..."
결혼까지 했는데 왜 전화했을까. 계속되는 야근으로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권 선배는 나의 동생들과 엄마의 안부까지 묻더니 자기가 결혼한 걸 아냐고 물었고 소식은 들었다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너 아직까지 결혼 못 했다며?"
‘못’이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들렸다. 못 한 게 아니라 안 했다고 말할까 하다가 어쩐지 구차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네가 지금 몇 살이지? 서른셋이지? 더 늦기 전에 해야지."
그의 목소리에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아, 이 말을 하려고 전화했구나. 결국 노처녀나 될 거면서 그렇게 콧대 높게 굴었니.
그래요, 그렇게 해서라도 선배의 분이 풀린다면. 난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을 때 할 거예요."
무릎 꿇은 선배를 차디찬 눈으로 모질게 대했던 그 스물 한살의 여학생은 세월이 지나 아이 둘을 가진 중년 여인이 되었다. 권 선배도 어디선가 중년의 모습이 되어 그의 성정대로 열심히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마지막 통화로 선배를 오랜 시간 동안 마음 고생시킨 일말의 미안함을 털었다고 생각했다. 선배도 끝까지 마음을 받지 않은 나에 대한 원망을 그렇게나마 복수해서 조금은 시원해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법 긴 세월을 겪고 나니 그것마저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모습이었구나, ‘그만의 집념’이라고 치부했던 선배의 행동이 비로소 자연스레 이해되고 마음이 애잔해진다.
상처받아도, 고통스러워도, 자존감이 바닥을 쳐도, 어쩔 수 없이 먼저 말하고, 먼저 그리워 할 수 밖에 없는.
비굴함 끝에 다시는 너를 쳐다보지도 않겠다, 이를 악물게 되기도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기꺼이 상처받는 일을 자초하고 마는.
무겁고 힘든 외사랑의 길을 참 오래도 걸었던 선배.
<단순한 열정>에서 작가 아니 에르노는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서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 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고 적었다.
모쪼록 선배의 한 시절이 저 문장과 비슷한 의미로 기억되기를.
청춘이어서 가능했던 시절이었다고 미소 지으며 기억해 주기를.
나는 실로 그렇다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