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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전화를 받았어야 했을까

버거운 우정

by 뮤뮤

1995년 8월의 무더운 날이었다. 나는 동기 여자애들과 함께 신촌을 걷고 있었다. 1학년 여름방학 중에 얼굴이나 보자고 해서 만난 날이었고, 더위를 어디서 피할까 궁리하던 참이었다. “어디서 북소리 나지 않아?”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니 정말 둥둥 북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경찰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거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깃발을 든 시위 행렬이 연세대학 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깃발은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연합회)의 것이었다. 그 뒤를 전국의 대학 깃발과 5.18 광주민주화, 정부타도 등의 구호가 쓰인 깃발이 뒤를 이었다. 우리는 원피스에 슬리퍼 차림이라는 것도 잊은 채 우리 학교 깃발이 보이자 별다른 고민 없이 시위 행렬에 합류했다. “김영삼 정권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걷는데 우리의 남다른 옷차림이 눈에 띄었을까. 한 학생이 무슨 과 몇 학년인지 물어봤고, 우리를 총학생 회장에게 데리고 갔다.


“우리 학교 깃발이 보여서요." 1학년다운 해맑은 이유에 학생회장은 기특하다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큰 행사 때마다 멀리서 본 그였는데 그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경영학과 90학번 H 선배, 유난히 큰 눈에 큰 입이 개구리를 연상케 했다. 오색깃발을 뒤로하고 그는 주변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작은 키였지만, 전혀 작아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 그가 왜 그런 당부를 했는지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나는 듯싶은 순간 함성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나면 이럴까. 휘뿌연 최루가스 속에 유리병 깨지는 소리, 비명 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호루라기 소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학생들과 경찰들 사이에 우리를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이제 갓 대학생이 된 지 몇 달 안 된 풋내기일 뿐이었다. 인생 처음으로 경험하는 큰 시위 속에 우리는 여기저기 휩쓸리다가 정신마저 아득해질 것 같았다. 몇 시간을 눈물콧물 흘리며 동분서주하다가 연대 안에서 잠시 몸을 피하고, 시위가 파하는 저녁 무렵에서야 거지꼴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로 한 달쯤 뒤에 H 선배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등록금 문제로 학생회와 학교가 대치 중이었는데 학생회장으로서 단식 투쟁에 들어간 그를 우리가 응원차 찾아갔다. 새내기들의 순수한 응원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술 한잔 사주고 싶다고 했고 단식투쟁이 끝난 가을의 어느 날 연락을 해왔다. 학교 후문에서 멀지 않은 작은 술집에 학생회 사람 몇몇을 대동하고 나타난 선배는 어떤 조직원의 보스 같은 카리스마를 풍겼다. 그의 손에는 <모택동 자전>이 들려있었다. 그때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정부, 대통령 같은 정치현안부터 시작한 주제는 마오쩌둥, 군사독재, 사회주의로 이어졌다.


사회주의, 운동권 같은 이슈는 군사정부가 끝나고 90년대로 들어와 힘을 잃기 시작했고, 95학번인 우리쯤에 이르러서는 내 주변 어느 누구도 그런 주제에 관심을 가진 이가 없었다. 같은 90학번인 우리 과 선배들도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진지한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어린 마음에 진정 대학생 다운 모습 같기도 했다.


취기가 오른 학생회 사람들과 우리들은 2차를 외치며 술집을 나왔다. 어른어른 가을 달빛이 골목길을 비추고 있었다. "여기부터 이 골목 맨 끝까지, 모든 술집을 가보는 거야!"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골목길을 가리키며 그가 호기롭게 외쳤다. 학생회 사람들과 우리들이 환호했다. 술이 오른 얼굴은 벌게져 있지만 눈은 달빛처럼 빛나던 선배를 기억한다.


이후로 서너 번 정도 더 그 모임이 이어졌던 것 같다. 그 사이사이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선두에서 마이크를 잡고 핏대를 세우며 어떤 구호를 외치는 선배를 볼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난 그가 학생회장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전형적이고도 힘이 센 선동 문구들이 그의 입에서 청산유수로 흘러나왔고, 마이크를 쥔 손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 연못에서 힘차게 뜀박질하는 초록 개구리, 선배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졸업하고 사회인으로서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H 선배가 얼굴이나 보자며 연락을 해왔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학교 술집에서 자리를 가진 후 거의 5년 만이었다. 선배는 5년 만큼의 세월보다 더 많이 늙어있었다. 그 커다랗고 큰 눈과 입 옆에, 제법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냈어요!" 반가운 내 인사에 선배는 웃으며 "그날밤 정말 좋았는데!"라며 응수했다. "그래요. 그때 선배가 골목길에 있는 모든 술집을 다 가자고 해서 깜짝 놀랐잖아요." 대화는 바로 5년 전으로 돌아갔다. 밤새 마시자는 말이 무색하게 3차에서 모두 쓰러진 이야기, 단식투쟁 때 우리가 찾아갔던 이야기, 여름 시위 때 우리를 만났던 이야기.


선배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 얘기를 하고 또 하고, 마치 테이프를 되감기 하는 것처럼 반복했다. 사실은 그것밖에 선배와 나 사이에 별달리 할 얘기가 없었다. 함께 무언가를 한 것도 없고,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도 몇 안 되었다. 그렇게 옛날이야기만 잔뜩 하다가 헤어졌고, 나는 선배가 오랜만에 옛 기억에 잠기고 싶었구나 생각했다.


반년 정도 뒤, 선배는 술 한잔 하자며 다시 연락을 해왔다. 우리는 인사동의 한 술집에서 조우했다. 막걸리 잔이 여러 번 비워질 동안 선배의 화제는 전처럼 내내 5년 전 그때에 머물러 있었다. 현재 어떤 일을 하는지, 그 일이 어떤지, 애인이 있는지, 사람들이 만나면 의례 하는 그 흔한 주제에 대해 선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의 근황을 꺼내도 어느새 대화는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몇 시간을 같이 있었지만 나는 선배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채 집에 돌아갔다. 다음번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배가 먼저 연락을 해오고, 나가면 마치 데자뷔처럼 같은 대화가 오갔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삶이 고달파서인지 그의 큰 눈은 점점 혼탁해 보였고, 술 몇 잔에 금방 취해버리고는 했다.


술에 취해 고개를 흔들며 졸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링 위에서 만난 강자에 속수무책으로 얻어터지고 정신을 잃어가는 복서 같았다. 언제 잽을 날리고 훅을 쳐야 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링 위에 올랐다가 나자빠진 복서. 그는 마치 삶의 요령을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마이크를 잡고 수천 명 앞에 서던 그 시절을 끊임없이 곱씹는 선배를 보면서 그가 자신이 빛나던 청춘의 시간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안 되었다. 젊은 우리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은가. 원치 않는 힘에 휘둘리기도 하고 꺾이기도 하면서, 인생의 쓰고 신맛을 느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으면 단맛에 취할 수도 있고 어찌 되었든 전진해야 한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대화가 자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아끌다시피 현실로 데려왔다. 그의 토로를 듣고자 했다. 5년 전 그 이야기들에서 벗어나 제발 지금의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랐다.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게 힘겨운 건지, 대학 내내 리더로 있던 내가 어쩌다가 여기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그런 상념에 괴로운 건지, 아니면 아직도 사회주의나 마오쩌둥 이런 사상에 빠져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만날 때 원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자기를 깨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청춘에 같이 박제된 새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선배와의 공통된 추억이 그렇게까지 소중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내 앞가림도 힘겨운 20대 후반의 여성일 뿐이었다. 점점 선배와의 우정이 버거워졌다.




선배를 다시 만나게 된 지 3년쯤 지났을 시점에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박제된 청춘을 곱씹는데 만족을 주려고 이렇게 무리해서 힘든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내 청춘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계속 1995년에 머무르겠다면, 나는 나대로의 미래를 향해 가겠다고 결심하려는 찰나, 그로부터 기쁜 소식을 받았다. 결혼한다는 것이다. 환갑이 되어가는 아들을 며느리에게 인계하는 심정이 이럴까. 결혼식장에 가는 나의 마음은 축하하는 마음 반, 후련함이 반이었다. 주제넘지만 모쪼록 그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학생회장 시절에서 벗어나 진정 어른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그 소식 들었어? H 선배 이혼했대." 불과 1년 뒤에 그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지인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술을 엄청 마신다는 후문도 함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부러 연락하지는 않았다. 겨우 매듭지은 우정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선배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 부르르 진동하는 전화를 보면서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 그가 지금 힘든 상황이라는 건 짐작 되지만, 몇 개 안 되는 추억을 고장 난 비디오 마냥 되풀이하던 선배와의 시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결국 나는 그의 전화를 끝까지 받지 않았다. 나로서는 할 바를 다했다는 생각이 들어 별다른 미안함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선배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H 선배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의 선택이었다고 했다. 유족들이 주변에게 알리지 않아 조용히 장례가 치러진 모양이라며.




왜 선배는 내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분명 괴로왔을 텐데, 분명 외로왔을 텐데. 내 손을 잡기에는 학생회장으로서 자존심이 상했을까. 그랬겠지. 끝까지 학생회 사람들을 거닐고 다니던 리더의 모습으로 남고 싶었겠지. 아, 혹시 그 마지막 전화가 내 손을 잡기 위한 신호는 아니었을까. 그때 전화를 받고 만났더라면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괴로운 심경을 훌훌 털고 나면 그런 선택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마치 선배의 되풀이되는 과거처럼, 이 시나리오가 박제되어 내 머릿속 한편에 자리 잡게 되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평안히 살다가도 스프링처럼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아, 선배는 어쩔 수 없었구나." 대장에 생긴 암을 절제했지만 1년 만에 폐로 전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날이었다. 낫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았지만, 내가 얻은 건 전이였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인생에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 의지와 결단을 떠나 있는 것, 내가 아무리 바라고 소망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어쩔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이 나를, 내 인생을 지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선배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어서 술을 마시고, 어쩔 수 없어서 옛날을 생각하고, 어쩔 수 없어서 다시 술을 마시고.


자신의 인생이지만 그것이 제 손을 떠나 있다고,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다고.


이제야 비로소 선배를 이해한 느낌이었다.


선배, 평안한 세계를 찾았나요. 오색 깃발을 뒤로하고 미소 지었던 선배 모습만 기억할게요.

이제, 정말 안녕.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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