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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태도가 된다

by 뮤뮤

나는 옷을 좋아하지만, 운동복에는 돈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빛바랜 티셔츠에 늘어난 츄리닝 바지를 입고 러닝에 나서도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운동복이란 건 좀 후줄근한 맛이 있어야 제맛 아닌가.

그런데 남편은 달랐다. 나이키, 아디다스, 데상트 같은 브랜드 운동복을 즐겨 입었다. 그의 서랍엔 시꺼먼 운동복들이 군복처럼 줄을 서 있는데, 나는 늘 고개를 갸웃했다.
‘다 똑같은 거 아냐? 뭐 하러 이런 데 돈을 쓰지?’



필라테스를 시작한 첫날, 뭘 입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내 방식대로 입고 갔다. 커다란 박스 티셔츠에 두툼한 레깅스. 쌀쌀한 봄 날씨라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굳은 몸을 억지로 늘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바로 내가 입은 옷이었다. 더운 걸 넘어서, 이건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갱년기 열감으로 이미 뜨거워진 몸 위에, 두꺼운 티셔츠와 레깅스는 극세사 담요 못지않은 역할을 했다. 땀인지 열기인지 모를 기운이 다리에서 피어올랐고, 체면이고 뭐고 바지를 벗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선생님의 세세한 코칭을 따라가기 힘들게 만든 것도, 결국은 옷 때문이었다. “승모근을 내리세요”, “어깨뼈 사이로 근육을 모아요” 내 근육이 박스티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자세가 정확한지도 알 길이 없으니, 결국 감에 의존해 동작을 이어갔다. 그제야 알겠다 싶었다. 다른 회원들의 복장이 왜 그렇게 몸에 착 붙는지. "민망하지도 않나" 싶었던 그 옷들이, 알고 보니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한 거였다.




안 되겠다 싶어 십 년 전 요가복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탑을 들고 나는 멈칫했다.
‘이게 진짜 내 옷이었단 말이야?’
마치 유아복을 꺼낸 것처럼 너무 작았다. 억지로, 억지로 몸을 구겼더니 겨우 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조이는 탑 위로 군살이 활화산처럼 솟았고, 숨도 가빠오는 것 같았다. 호흡과 순환 모두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나는 결심했다. 새 운동복을 사기로.


안다르, 젝시믹스 같은 사이트를 뒤지다가 “왜 이 조그만 옷이 7만 원이지?” 탄식을 삼켰다. 정말 운동복 따위에 이 돈을 써야 하나, 내키지 않는 손가락이 한참을 폰 위에 머물렀다. 결국 나는 반값 세일 중인 제품들만 골라 담았다.


며칠 뒤, 택배 상자를 열자마자 알아차렸다. 이걸 왜 세일했는지... 애매한 베이지, 어정쩡하게 떨어지는 어깨선. 그 상자는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옷들의 마지막 안식처 같았다. 하지만 반품은 귀찮고, 교환은 더 귀찮았다. 마음에도 없는 아이템을 다시 고르는 일에 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싼 맛에 입지 뭐" 텍을 떼었는데 문제는 그 옷이 아니라, 나를 아무렇게나 입히는 내 태도였다.


무슨 옷을 입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이듯, 대충 고른 운동복은 나를 ‘대충‘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애매한 베이지는 얼굴빛을 눌러앉혔고, 기묘한 어깨선은 “내 어깨가 저렇게 넓었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운동에 집중하자, 자세에 집중하자’
다짐해도 내 눈은 끊임없이 거울 속 내 옷에 가 닿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운동하는 내내 기분이 영 좋지 않다는 걸. 몸을 챙기러 왔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이왕 하는 운동, 기분 좋게 할 순 없는 걸까.


다른 회원들의 운동복이 눈에 들어왔다. 화사한 파스텔톤 상의, 그에 어울리는 톤온톤 하의, 섬세한 봉제선과 세련된 핏. 무심한 듯 예쁜 옷들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의 감탄 소리가 들렸다.

“핑크색 탑 너무 예뻐요. 진짜 잘 어울려요!”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의 50대쯤 되어 보이는 회원이었다.

“어제 아웃렛 갔다가 세일하길래 몇 벌 좀 샀어요. 레깅스가 스무 벌이나 있는데도 또 샀지 뭐예요.”

“스무 벌이요?”
선생님이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 맛이 또 있죠!”




‘그 맛‘이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예쁘게 입고, 기분 좋게 운동하는 맛. 나에게 없었던 게 바로 그거였다!

깊은 깨우침을 얻고 다시 운동복 사이트를 열었다. 이번엔 가격보다 내가 좋아하는 색, 나한테 어울리는 핏을 봤다. 그렇게 고른 옷을 입고 갔던 날, 거울 속 내가 괜히 근사해 보였고 운동 시작 전부터 내 안에 작은 흥이 피어올랐다.

한창 기구에서 몸을 비틀고 있을 때, 선생님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내 사진을 여러 장 찍는 게 아닌가. 원래 선생님은 수업 중 "이거다!" 싶은 장면이 나오면 센터 SNS에 올릴 사진을 찍곤 하는데, 그날은 나에게서 영감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사진을 찍느라 자세를 더 오래 버티게 하자, 결국 내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 해야 하나요?’ 하는 눈빛으로 선생님을 쳐다보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하핫, 죄송해요. 오늘 컬러 조합이 너무 예뻐서요. 안 찍을 수가 없네요.”




그날은, 이상하게도 운동이 덜 힘들었다. 자세가 드라마틱하게 좋아진 건 아닐 테다. 하지만 마음의 결이 분명 달랐고, 어쩌면 그 변화가 자세에 스며든 걸지도 모른다. 그게 운동복의 힘일까. 사람들은 그래서, 운동복을 고르고 또 고르는 걸지도.

즐거운 기분. 그게 운동을 조금은 덜 고단하게 만들어주니까. 의욕이 살아야, 운동도 오래 갈 수 있다.

… 그래도 레깅스를 스무 벌이나 사지는 말자.
지름신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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