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쌀밥을 먹어야 할 때
한 달 전부터 밥이 당기는 증상(?) 때문에 삼시 세 끼가 착잡하다
젠장, 12월 1일이다. 앞으로 딱 삼십일 하고도 하루가 더 지나면 서른 살이다. 어제까지는 하루하루가 아까웠는데 오늘부터는 일분일초가 아까워질 예정이다.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훗날 강렬하고 짜릿하며 후회 없는 스물아홉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일분일초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영양가 없는 고민으로 금 같은 일분일초를 열 번 정도 넘겼을 때, 배가 고팠다. 오늘도 밥이 당겼다. 밥이 당길 때마다 나는 밥 외의 다른 메뉴들을 바쁘게 떠올린다. 제발 밥 아닌 다른 음식이 당기길 바라며.
한 달 전부터 밥이 당기는 증상(?) 때문에 삼시 세 끼가 착잡하다. 나로 말하자면 쌀밥 없이도 열흘은 거뜬한 사람이었다. 밥보다 피자나 햄버거, 라면 같은 밀가루 음식이 더 좋았고, 찌개는 고깃집 갔을 때나 한 두 수저 떠먹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국물과 쌀밥이 당긴다. 국밥.. 국밥이 자꾸만 먹고 싶다.
이게 다 서른이 가까워졌기 때문인 것만 같다. 패스트푸드나 과자로 끼니를 해결할 때마다 “그게 밥이 돼?”라고 물었던 부모, 선배, 어른들의 멘트는 이제 내 것이 되었다. 크림빵에 우유로 밥을 대신했던 과거의 나를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되어버릴 줄 알았더라면 어릴 때부터 일부로라도 쌀밥에 찌개를 찾아먹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런 불필요한 상실감 및 패배감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엊그제는 출근하기 전 식사를 때울 요량으로 편의점에 갔다. 역시나 밥이 당겼지만 샌드위치를 먹어야만 한다는 옅은 강박에 몇 분 동안 에그 샌드위치를 노려보다가 너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깨닫고 언양불고기 김밥을 한 줄 사서 나왔다. 쓴웃음이 나왔다. 이게 뭐라고 억지를 부렸나. 이깟 거에 과민 반응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스리며 편의점을 나왔는데 바닥에 흩뿌려진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비둘기를 보고 그만 찌질하게 분노하고 말았다.
“나도 네 나이 땐 돌도 씹어 먹었거든?” 우스운 혼잣말까지 읊조렸을 때 깨달았다. 방금 내가 한 말, 극혐 하는 꼰대 멘트가 아니던가. 서른이 너무 싫다고 해서 서른을 뛰어넘고 곧장 꼰대로 렙업 해버릴 것 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애써 농담인 척 웃으며 급하게 만 나이를 헤아려봤다. 만으로 하면 아직은 넉넉한 이십 대였다. 그러다가 확실하게 서글퍼졌다. 만 나이라는 것은 서른이 가까워졌을 때야 집착적으로 헤아리는 것이 아닌가.
회사에서 차디찬 언양 불고기 김밥을 씹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배고픔이 가라앉으니 비둘기 앞에서 가볍게 끊어져버렸던 이성의 끈이 조금씩 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른이 된다고 갑자기 머리가 세고 관절이 급속도로 상하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즐거울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다들 즐겁다고 하던데) 왜 이렇게 겁이 나고 싫을까. 아무래도 유익한 조언이 필요했다. 서른셋의 회사 언니에게 서른이 되기 싫어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언니는 서른이 넘으니 이십 대보다 훨씬 여유롭고 즐겁다고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들었는데도 안심이 되었다. 역시 서른이 엄청나게 끔찍한 것은 아니구나. 다가오는 서른을 향해 마음의 문을 아주 조금 열까 하는데 언니가 덧붙였다.
“근데 스물아홉에서 서른 넘어가는 거 존나 끔찍해. 나는 서른이 딱 되던 순간. 그러니까 자정이 되었을 때 버스에서 울었어”
놀라서 물었다.
“왜요?”
“왜긴. 좆같으니까. 나는 삼십 살이나 됐는데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고양이도 없었거든”
“언니 친구들도 그랬어요?”
언니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끔찍한 건 자신이 조금만 있으면 삼십 대 중반이 된다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그건 또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럴 것 같았다. 앞으로는 5년을 주기로 이 끔찍함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안 그래도 착잡한 나를 더 심란하게 했다. 서른을 넘으면 서른 중반이, 그다음엔 마흔이, 그다음엔 마흔 중반이 나를 골릴 터였다.
갑자기 생일 초 앞에서 ‘내가 쉰이라니’ 작게 탄식하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던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그때는 생일 초를 앞에 두고 한숨 쉬던 엄마의 예민함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에 와서야 떠올린 엄마의 예민함은 차라리 의연함에 가까웠던 것 같다. 혹여 하나라도 빠뜨릴 새라 50개의 생일 초를 하얀 케이크 위에 꼼꼼히도 꽂았던 과거의 잔인한 나를 어떻게 혼내야지 엄마께 사죄할 수 있단 말인가. 가쁜 숨으로 50개의 생일 초를 모조리 꺼버리던, 어쩐지 슬퍼 보였던 엄마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르니 부끄럽고 미안해서 눈이 질끈 감겼다.
갑자기 밥이 당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이 나이 먹고도 어리석게 까불고 섣부르고 서툴러서 갑자기 밥을 찾나 보다. 밥 중에서도 꼭꼭 씹고 후후 불어먹어야 하는 국밥이 당기나 보다. 서른 되기 전에 그동안 안 먹은 밥 먹고 좀 더 자라려고, 자라서 성숙해지려고, 진작 밥 많이 먹고 어른스러워진 친구들의 반만큼이라도 따라가려고 밥을 먹나 보다. 그깟 비둘기한테 질투 섞인 꼰대 멘트나 날리고, 환갑 바라보는 엄마 앞에서 생떼 부리는 나는 진짜 밥 좀 먹고 더 커야겠다. 앞으로 남은 한 달이 이십 대를 마무리하는 하이라이트의 시간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멋진 서른을 위한 촉박한 준비기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