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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슬 Jan 07. 2022

여러 권의 부적

나는 일기장 앞에서만큼은 진짜로 진짜인 내가 되었다.

아빠는 위험한 기계와 화학약품을 다뤘고 엄마는 이제 막 젖을 뗀 어린 동생을 들쳐 업고 보험을 팔던 때였다. 아빠의 위험한 현장에 따라갈 수도, 엄마의 또 다른 혹이 될 수도 없었던 나는 아빠의 출근길에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울며 들러붙는 나를 겨우 떼어 낸 아빠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러나 도망치는 발걸음으로 얼른 대문 밖을 나섰다. 빠르게 멀어지는 커다란 등을 바라보며 아빠의 미안한 표정과 도망치는 발걸음 중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마음이 미어졌다. 울면서도 울고 싶었다. 정말이지 나는 언제까지고 울고 싶었다.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퇴근한 아빠가 헤어질 때와 같은 모습으로 흙바닥에 주저앉아 사지를 함부로 널브러뜨린 채 울고 있는 불쌍한 내 모습을 보기를 바랐다. 나를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래며 불쌍한 우리 딸 다시는 아빠가 널 놓고 가지 않을게, 약속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눈물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만큼 나와 주는 법이 없었기에 눈물이 마르면 건조한 눈자위를 축축한 옷소매로 도로 적셔가며 나는 여전히 울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 짓도 오래는 못할 짓이었다. 눈두덩이가 쓰라릴 때쯤 나는 자존심 상해하며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한 번도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헐떡이는 등을 투덕투덕 두드려주는 법이 없었다. 

다만 밥 먹으라고, 그것이 절대 걸러선 안 되는 중차대한 일인 것처럼 단정하게 차려진 작은 밥상을 내 앞으로 밀어주며 자꾸 밥 먹으라고만 했다. 그 말을 들으면 어째선지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밥상을 본 척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장롱에서 딱딱하고 무거운 이불을 꺼낸 뒤 맨바닥에 누워 그것을 덮은 채 눈을 감았다. 자기 연민에 더 오래오래 빠져있고 싶어서였다. 딱딱한 바닥에 불편하게 누워 딱딱한 이불을 아무렇게나 몸 위에 얹은 뒤 딱딱한 표정으로 나를 버린 부모와 버려진 나를 생각했다. 

아침방송 프로그램의 패널들이 즐겁게 떠드는 소리와 밥 안 먹을 거냐는 할머니의 짜증이 문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노력해도 나오지 않는 눈물을 야속해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한참을 자다가 눈을 뜨면 사방이 고요했다. 할머니마저 밭일 나가고 없는 집에서 차갑게 식은 밥을 혼자서 먹고 배가 부르면 유리창 앞에 멍하니 오래 앉아있었다. 유리창 바깥의 세상이 아닌 유리창에 반사되는 내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반투명한 평면의 내 모습은 미묘하게 어긋난 두 겹이었다. 둘 중 무엇이 진짜 내 모습일까. 곰곰이 두 겹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자면 둘 다 내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고 이내 시리도록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내가 속해선 안 되는 세상에 기어코 눌어붙은 이물질이 된 것 같은, 내가 나를 잃어버릴 것 같다는, 아니, 어쩌면 이미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외로운 불안과 알 수 없는 낙심이었다. 

그럴 땐 정강이를 힘껏 끌어안은 채 무릎과 가슴 사이에 고개를 처박았다. 스스로를 꼭 껴안으며 내가 나임을 확인하고 싶어서 애를 썼다. 찰나였으나 나조차 나를 잃어버린 절대적 미아가 된 순간으로서 그때를 기억한다. 


생애 최초로 나를 잃어버린 그날은 사라지지 않고 세포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불쑥불쑥 되살아나곤 했다. 내 이름과 생김새와 목소리를 비롯하여 내가 웃고 말하고 먹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낯설어지는 것이다. 내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짜로 진짜인 나는 아닌 것 같은 기분. 학창 시절에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그 기분에 자주 몸서리를 쳤다. 온몸에 쇳가루가 뿌려진 듯한 서늘한 기운에 한차례 휩쓸린 후엔 곁에 있던 친구들을 붙잡고 너희들도 혹시 이런 기분을 느끼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것을 가리키는 명징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나는 ‘낯선 기분’이라는 표현을 썼다. 모든 것이, 심지어 자신조차도 죄다 낯설어지는 그 기분을 아느냐는 내 질문에 친구들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오직 j만이 눈을 빛내며 자신도 그걸 안다고 말했다. 같은 감정을 누군가도 느낀다는 사실이 무지하게 반가워서 그날 걔랑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종례를 마치고 짐을 싸던 중에 걔는 보여줄 게 있다며 자신의 집에 가자고 했다. 그 애가 자신의 방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내 보여준 건 다름 아닌 일기장이었다. 도톰한 공책 표지에는 ‘비밀 일기’라고 적혀있었다. 


“이건 아무한테도 보여준 적 없는 거야”


나는 J의 비밀이 농축되어있을 도톰한 일기장을 쳐다보며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몇 개 읽어줄 수 있어?”


어려운 부탁인 것 같아 말하자마자 후회했는데 걔는 의외로 선뜻 일기장을 펼쳐 몇 대목을 읽어주었다. 딱히 비밀스럽지도 않은 내용들을 괜히 마음 졸이며 들었다. 일기장을 덮은 J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닥거렸다.   


“내가 이거 보여준 거 비밀이다?”


J는 출출하다며 주방에서 커다란 양은 냄비에 콘프라이트와 우유를 가득 담아왔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그것을 우걱우걱 퍼먹었다.


“이슬아 너도 일기 써?”

“그냥 학교에 내는 용도로만 썼어”

“너도 일기를 써. 내가 만화책에서 봤는데, 자기가 누구인지 계속 까먹는 사람이 매일매일 일기를 쓰더라고. 그걸 본 뒤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

“왜? 너도 네가 누구인지 까먹어?”


걔는 대답 없이 우유 묻은 입을 손등으로 훔치며 씨익 웃었다.      

J가 읽은 만화책의 등장인물은 어째서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일기 쓰기를 택했을까. 아마도 사람이 가장 진짜가 되는 순간은 글을 쓰는 순간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진심을 말로 다 전하지 못할 것 같을 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구점에 들러 고심해서 일기장을 골랐다. J가 그랬던 것처럼 표지에 아주 큰 글씨로 비밀일기라고 적었다. 나는 일기장 앞에서만큼은 진짜로 진짜인 내가 되었다. 슬프지 않다고 말해야만 했던 날, 내가 내 말에 속지 않으려고 일기장에 슬프다고 적었다. 안 웃긴 척했던 날에도 일기장엔 사실 그때 우스웠다고 적었다. 부모님께는 거짓말을 했을지언정 일기장에는 진실만을 적었다. 남 보기엔 시시한 이야기들을 미간을 찌푸려가며 열정으로 적었다. 그것이 생각보다 더 중요한 작업이었음을 다 자라서야 깨닫는다.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가짜로 진짜인 나로 사느라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가짜로 웃고 가짜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시간이 너무 길어진 나머지 언젠가부터는 내 가짜 웃음에 내가 속는다.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어쩌면 거의 완벽한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어느새 나는 내게 이로울 것만을, 기억되고 싶은 부분만을 편집해서 타인에게 내보이는 것이 능숙한 사람이 되었다. 술에 취해서 건 무심결에 건 솔직한 내 모습을 보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실수했다고, 생각이 짧았다고 후회하는 내 모습이 내가 사람들 앞에서 가짜로 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가짜라고 느낄 때마다 진짜로 사는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삶에 대한 책임감으로 일기를 썼다. 어릴 때에 비하면 지독할 정도로, 그래서 나조차도 들여다보기 싫을 정도로 솔직한 날것의 글들이 일기장 갈래갈래 빼곡해졌다. 내가 나를 샅샅이 까발리면 까발릴수록 위로가 되는 건 희한한 경험이었다.       


일기는 모든 글쓰기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투명한 작업이다. 초고가 곧 완고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보여줄 글이 아니기에 퇴고란 무의미하며 어쩌다가 고쳐 쓰더라도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아무것도 잴 것이 없는 글쓰기는 후련하며 위대하다. 곡해의 염려나 미사여구의 고민 없이 작가인 동시에 독자로서 그저 솔직함만을 주고받는 시간은 얼마나 진실하고 귀한가.       


만약 내가 일기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어떤 글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책에 실린 글들은 전부 일기에 빚졌기 때문이다. 질리도록 솔직한 글을 오랫동안 썼기에 그보다 덜 솔직해지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했을 테니 행복 또한 일기에 빚졌다. 그렇다면 행복은 내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이므로 나는 삶 통째를 일기에 빚진 거 아닐까.     

어린 날 유리창 앞에 앉아 자신을 껴안으며 떨었던 그날, 나조차도 나를 잃어버리는 기분이 얼마나 고약한지 알아버린 덕에 일기를 썼다. 일기를 쓰는 순간만큼은 내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써왔고 앞으로 쓰게 될 일기들은 어쩌면 스스로를 절대 잃어버리지 않게 해 줄 부적 인지도 모르겠다.  




톱클래스 1월호 200회 특집 <나다움을 묻다>에 실린 글입니다.

topclass > 강이슬 (chosun.com)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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