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 없는 포도
어릴 적, 집에는 켐벨포도 상자가 몇 상자씩 들어왔다. 여름만 되면 지인들이 한 상자씩 보내주셨었던 것 같다. 껍질도 있고 씨도 있는 켐벨포도는 우리 집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는 과일이었는데, 나는 그 포도가 좋았다. 아무도 안 좋아하니 눈치 안 보고 맘껏 먹을 수 있었고 그 맛있다는 머루포도나 거봉, 청포도보다는 켐벨포도가 맛있었다. 새콤 달콤한 맛이 좋았고, 시원한 과즙까지 쪽 하고 먹으면 여름의 한더위가 사라졌다. 씨는 어느 순간부터 빼지 않았다. 그냥 한입에 먹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포도는 다 켐벨포도인 줄 알았는데... 외국살이를 하다 보니 캠벨포도 구하는 게 참 어렵다. 캐나다에서도 캠벨포도보다는 청포도가 더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좋아하는데.. 난 청포도는 별로였다.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포도종류는 정말 많은데 캠벨 포도는... 없다.
다른 포도들로는 대체가 안되는데, 비싼 돈 주고 샤인머스캣을 사 와도 포도 한 알 먹고 나면 더 이상 손이 안 간다. 캠벨 포도가 먹고 싶다.
한국에 한 번씩 들어가면 수화물짐을 가득가득 채워온다. 캐나다에서는 택배로 받는 재미가 있었는데, 인도네시아는 세금이 어마어마하게 붙어서 택배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가면 500g도 남지 않게 가득 채운다. 특히나 가루다항공은 30kg을 채울 수 있으니 빈칸 없이 채운다.
보통 가지고 들어오는 것들은 아이들 책, 장난감, 한국 과자, 캔디, 초콜릿, 그리고 스팸처럼 캔에 들어 있는 제품들이다. 육류나 채소, 과일 등 생 것들은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 공항에서 엄격하게 검사하다 보니 가지고 들어갈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한 번은 수화물검사장에서 X-ray에 걸려 가방을 열었던 적이 있다. 뭐가 걸렸나 슬쩍 보니 초록색 덩이와 빨간색 덩이가 가방 안에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직원들이 묻는다.
'도대체 이 초록색이랑 빨간색은 뭐야?'
'하하. 이거 미역줄기하고 고추장~~ 한국 양념이야~'
'아~ 그 바다에서 자라는 풀?? 인도네시아에서도 파니까 여기서 사 먹어~'
'아 그래그래^^;;'
혹시나 뺏길까 웃는 얼굴로 열심히 대답하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아마 rumput laut(바다의 풀).. 김이나 미역이나 미역줄기나 다 같은 말로 번역된다.
그걸 먹는 나라가 아니니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겠지..
아니야~ 그 맛이 그 맛이 아니라고..
이번 한국방문 때는 남편 연구도 진행되어서 남편은 며칠을 더 머물기로 정했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올 때 가져온 가방에는 엄마의 파김치와 설탕에 절여있는 캠벨포도가 있었다.
'너네 남편 파김치 잘 먹더라~ 그래서 좀 싸서 보냈어~'
응응~ 짧은 대화를 마치고 그렇게 남편이 없어 긴장했던 내 몸을 하루 이틀 좀 쉬게 한 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김치 너무 맛있게 먹었어~ 포도도 보냈더라?'
'응~ 그거 씻어 먹었어??'
'응?? 포도를?? 설탕에 절여서 주스 만들어 먹으라고 한 거 아냐?'
'아이고~ 그거 포도 씻어서 먹으라고 설탕 넣어 보낸 거야~ 그냥 과일은 못 가져가잖아~ 절여놓으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설탕을 씻으면 그냥 먹을 수 있을 거야~'
'아!!!'
설탕에 절인 포도...라고 하기엔 설탕들이 물기하나 묻어 있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보냈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포도 먹여주고 싶은 엄마 마음이었나 보다.
하루이틀 쉬는 바람에 밑에는 살짝 즙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 위에 있는 포도들은 싱싱하다.
엄마말대로 설탕을 씻어 먹어보니 캠벨포도 그 맛이다.
맛있다.
캠벨포도를 먹으면 한국맛이 난다.
한국의 여름을 느낄 수 있고 한국 여름의 추억들이 몽글몽글 올라온다.
방학 때 뒹굴 뒹굴 하며 먹던 포도.
시골의 한 교회에서 여름 수련회동안 먹었던 포도.
남아도는 포도로 포도잼도 만들고 포도주스도 만들어먹던 어릴 적 추억들.
그래서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여름의 좋은 추억들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