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위한 사랑 한 입 0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그를 향한 애잔함이 출렁거렸지만 머릿속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반복되는 일상은 더없이 감사한 일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만들어 버렸고, 나의 하루는 여전히 아이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을 절실한 간절함으로 바꿔준 건 한 권의 그림책이에요.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만난 그림책 <씩씩해요>는 제 마음과 몸 전체를 강렬하게 뒤흔들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기 일쑤인 다짐과 결심을 다잡아주었습니다.
나를 일깨워준 그림책 한 권
그건 아주 무서운 사고였대요. 아빠 차는 공중에서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고 했어요.
새빨간 화면, 자동차 두 대. 무서운 사고가 일어난 뒤, 아빠는 온갖 줄을 달고 병원 침대에, 아이는 수술실 앞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아빠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아주 긴 시간을요.
엄마는 바빠집니다. 엄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새로 구한 일터에 나가고, 아이는 너무 넓은 식탁에 혼자 앉아 밥을 먹습니다. 아이는 혼자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그런 일상이 힘겨워요. 엄마는 그런 아이를 데리고 산에 올라, 아이에게 웃으며 말합니다.
“이제부터 우리 둘이 씩씩하게 사는 거야. 알았지?”
아이는 달라집니다. 혼자서도 할 줄 아는 것들이 많아지고, 혼자여도 괜찮은 것들이 많아져요. 엄마도 마찬가지예요. 엄마는 이제 운전을 하고, 전구를 갈아 끼우고, 하지 않았던 일을 척척해내기 시작합니다.
사진 속 아빠가 나를 보며 웃어요. 나도 아빠를 보며 웃어요.
아빠는 사진 속에서 아이를 보며 웃습니다. 늘 같은 자리에서, 아이를 향해 활짝 웃어줍니다. 아이는 아빠를 보며 함께 웃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씩씩해요.”
씩씩하게, 예쁘게. 기특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어요. 단순한 색과 선, 짧은 문장이 만들어낸 거대한 폭풍 안에서 한참을 흐느꼈습니다. 쉬이 나갈 수가 없더라고요. 가슴을 조여오는 두려움을 전해주는 책, 현실로 닥친 죽음 앞에서는 처절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과 상실감은 마음의 준비 같은 것으로 결코 덜어질 수 없음을 실감하게 하는 책을 통해 저는 가장 외면하고 싶어 했던 ‘남편의 죽음’을 마주했습니다.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가장 큰 두려움
뜨겁게 연애를 하던 시절,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 엄청난 공포를 느낀 적이 있어요. 특별할 것 없는 아주 평범한 어느 날이었는데,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갑자기 이 사람이 사라지면 나는 어떡하지? 이 사람이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죽을 병이라도 걸리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살 수 있을까? 이 사람이 없는 세상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찌할 새도 없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어요. 과호흡 증상처럼 가슴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압박감에 눈앞이 캄캄해졌던 날.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저는 그날 처음 경험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아줌마가 된 지금은 전처럼 숨을 헐떡이며 두려움에 떨진 않아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예기치 않은 어떤 순간 내가 감당하고 넘어야 할 산으로 찾아올 일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언제 내 곁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존재해요. 내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깊은 불안과 걱정,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새해 카드에 적는 당부는 언제나 "올해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살자." 출근하는 그에게는 "운전 조심해. 집에 있는 나랑 아이를 생각하라고." 시시때때로 하는 협박은 "우리만 두고 일찍 죽기만 해봐! 내가 저승까지 쫓아가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며 봤던 그의 뒷모습이 지워지지 않아요. 내가 처음으로 바라본 그의 뒷모습, 결코 잊을 수 없는 그의 뒷모습. 3일 내내 한없이 지켜보았던 그의 뒷모습은 그가 그의 아버지처럼 내 곁을 너무 일찍 떠날지도 모른다는 지울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슴속에 각인되었습니다.
피하고만 싶었던 신랑의 죽음을 마주하게 만드는 한 권의 책을 다시 펼쳐 천천히 넘겨봅니다. 빨간색, 초록색, 주황색… 단 하나의 색으로 채워진 그림은 흑백의 그림보다 선명한 아픔을 전달했어요. 하지만 엄마와 아이는 산에 올랐고, 서로를 끌어안아요. 그리고 색색의 산봉우리를 내려다봅니다.
연두색, 주황색, 보라색, 하늘색, 빨간색… 산에서 내려온 엄마와 아이의 일상에는 색깔이 돌아와요. 다채로운 색깔의 산꼭대기에 꼭 붙어 앉아있는 아이와 엄마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깨달았습니다. 내가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를요.
‘내가 해야 할 일은 색깔을 만드는 일이구나.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 산에 올랐을 때 단색의 후회만 가득해서는 안 되지. 색깔을 만들자. 아프고 괴롭지만 그래도 우리 함께여서 행복했던 시간과 기억들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아름다운 오늘을 만들자. 언제여도 후회 없이 ‘나 최선을 다해 당신을 사랑했다’ 당당할 수 있는 오늘을 살자!’
그에게 자유 시간을 선물하는 이유
그림책을 만난 그 주부터 그에게 자유 시간을 선물했어요. 격주에 한 번, 오후 3시에 퇴근하는 평일 중 하루는 대낮부터 새벽까지 혼자 놀기! “정말? 진짜 그래도 돼? 지금 당장 나 혼자 나가라고?” 정말 혼자 나가 놀아도 되는지 갈팡질팡 고민하는 그의 등을 우격다짐으로 떠밀어 보냈습니다. 남편이라는 딱지, 아빠라는 딱지를 떼고 ‘나’라는 한 사람으로 맘껏 놀다 오너라 독려하면서요.
그는 맛있는 밥을 먹고, 자동차 청소를 하고, PC방에 들어가 맘껏 게임을 했다고 해요. 어느 날에는 사우나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어느 날에는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는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며 다채로운 색깔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오로지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그는 밝아졌어요. 다음 자유시간에는 무얼 할까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소풍 전 날의 초등학생과 다를 바가 없었고, 오로지 놀아주기만 가능하던 아빠의 모습은 씻기기와 밥 차려 먹이기, 유치원 가방을 챙겨 등원 시키기까지 가능한 단계로 진화했습니다.
밤 10시에 퇴근하는 평일에는 몇 시에 들어오든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일과 후 시간을 즐기기
일주일에 두 번은 아이와 둘이 데이트하기
격주에 한 번은 한가로운 평일을 누리기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땐 무얼 하든 간섭하지 않기
그가 아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땐 무얼 하든 타박하지 않기
그가 보여주는 영상이, 그가 사주는 마트표 과자가 탐탁지 않더라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기
나만의 규칙과 우리만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정착되었고, 매장 이전으로 일찍 퇴근하는 날이 없는 요즘은 주말 시간을 나눠 쓰며 탄력적으로 조율해요. 고된 업무에 지친 남편이 낮잠을 자는 동안은 내가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그가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는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카페에 나가면서요.
따로 또 같이 하는 우리만의 일상은 떨리는 설렘과 놀라운 집중력을 가져왔습니다. 때때로 불타지만 때때로 무관심하며, 때때로 애틋하게 서로를 연민하는 우리는 서로의 필요를 찾아 채워주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오늘이 가장 좋은 날,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요.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20년 뒤, 50년 뒤가 당연히 존재할 거라고 믿는 오만의 자세를 버리려고 노력합니다. 백세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요? 내가 100세까지 살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요? 오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떤 사고를 어떻게 만나 무슨 일이 펼쳐질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데 말이에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오늘 내 곁에 그가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 내 마음을 내일로 미루지 않기.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 고마운 마음, 대견한 마음은 그때그때 매 순간 꺼내어 표현하고, 그와 함께 하는 밥상을 기다리며 군침을 삼킵니다.
수단으로 희생하지 않는 오늘의 삶
칸트는 말했습니다. "사람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의 ‘아빠’에 대해 생각합니다. 야근이 ‘당연한’ 현실 속에서 아빠의 자리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일상. 엄마의 마음에서도, 아이들의 마음에서도, 아빠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아빠의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한 아이의 아빠이고, 한 여자의 남편인 동시에 그냥 ‘나’라는 한 사람이니까.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해야 하는’ 일에서 벗어날 시간이 필요한 것이 자명 한 일이잖아요. 한 아이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인 동시에 그냥 ‘나’라는 한 사람이니까. 엄마로서, 아내로서 ‘해야 하는’ 일에서 벗어날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요.
엄마가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재물이 아니듯
아빠 역시 돈을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기억하기.
‘나’와 ‘너’가 살아있지 않으면 ‘우리’가 행복할 수 없음을,
‘따로’ 없는 ‘함께’는 영원할 수 없음을 잊지 않기.
장담할 수 없는 우리의 내일을 그리며 오늘의 그를 사랑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진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열렬히,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 다짐하면서요.
나를 채우고 너를 챙길 때 찾아오는 일상의 설렘을 함께 누려요.
오늘도, 내일도-
사랑하기 좋은 날, 사랑받기 참 좋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