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선사한 책이 있다. 다른 손님도 있는 서점에서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겨 보다 나도 모르게 육성이 터져 나왔다. "헐! 이렇게 끝난다고? 이게 결론이라고? 진짜로?" 결론이 어떻길래 그러느냐 묻는 일행에게 책을 건네며 말했다. "이런 스토리의 그림책은 처음이에요. 와아-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는 결론인데요? 한번 읽어보세요."
그렇게 만난 그림책의 제목은 <바다야, 너도 내 거야>,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난 화가이자 그림책 작가 올리버 제퍼스의 작품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파우스토'는 모든 걸 다 가졌다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우긴다. 파우스토는 길가의 꽃에게, 양에게, 나무에게, 들에게, 숲과 호수, 산에게도 말한다. "넌 내 거야. 넌 내 거야!"
뜬금없는 파우스토의 선언에 꽃은 "맞아요." 답하지만 양은 "아마 그럴 거예요.", 나무는 "당신 것일 수도 있겠네요."라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난데없는 파우스토의 소유권 주장이 황당하기만 할 호수는 못 들은 척 하기 전략을 구사한다. 산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파우스토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 올리버 제퍼스, 주니어김영사 <바다야, 너도 내 거야> 중에서
이 뻔뻔한 아저씨는 발을 쾅쾅 구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시뻘게진 고개가 뒤로 넘어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림책을 보던 9살 아이 입에서 "이 아저씨 왜 이래?"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생떼가 펼쳐진다. 결국 산은 소유권을 양도한다. "그래, 네가 내 주인이야. 난 네 거야."
모든 것을 가진 파우스토는 우쭐해진다. 여유롭게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간다. 산과 호수, 숲과 들과 나무, 양과 꽃을 다 가져도 만족스럽지 않았던 파우스토는 바다 한복판에서 외친다. "바다야, 너도 내 거야!" 바다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파우스토는 바다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바다의 소유권은 누구의 것이 되었을까?
<The Fate of Fausto>라는 원제는 책의 내용을 짐작케 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충격적인 결말은 'Fate’, 운명이다. 초월적인 힘으로서의 운명, 숙명. 운명에 따라 일어나는, 특히 좋지 않은 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끝날 파우스토의 최후는 2020년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림책의 결말은 ‘더 많은 것을 네 것으로 만들어라!’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침몰을 예고한다. 작가는 이건 어디까지나 ‘우화’임을 강조했지만 이미 우리의 현실은 재난 영화 안에 있다.
"이것도 내 거, 저것도 내 거. 다 내 거. 모두 내 거!"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소유하라! 더 빈번한 소비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하는 삶의 방식을 거부한 우리는 회사 밖에서 산다. 안정적인 직장과 월급을 버렸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번다. 그는 가지고 오는 돈보다 가져다줘야 하는 돈이 많은 프랜차이즈 자영업자, 나는 얼마큼의 돈이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프리랜서이다. 우리는 돈보다 시간을 욕망했고, 그렇게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었지만 재난은 우리의 저녁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코로나19가 모든 일상을 앗아간 2020년 상반기, 우리는 딱 하나 남아 있던 적금 통장을 헐어야 했다.
그건 마지막까지 남겨두고 싶은 보루였다. 돈의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 가족을 지켜줄 것만 같은 진지였다. 마이너스 통장을 안 쓰는 게 어디냐고, 그래도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지 않냐고. 우리보다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흔들렸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했던 게 아닐까, 우리의 선택이 신중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재난의 위기를 막아줄 수 있는 안전망이 부재한 현실에서 나는 불안했다.
- 올리버 제퍼스, 주니어 김영사 <바다야, 너도 내 거야> 중에서
예측할 수 있는 내일을 달라고, 선명하게 보이는 미래를 달라고. 나는 파우스토처럼 자주 생떼를 부렸다. 다음 주의 등교 가능 여부도 알 수 없는 오늘이 버거웠다. 종종 화가 나고 숨이 막혔다. 울컥 눈물이 쏟아져 진이 빠졌다. 등교 없는 일상에 마냥 신이 났던 아이도 이내 지쳐갔다. 아이 곁에는 늘 그나 내가 있었지만 또래 친구들의 자리를 채울 순 없었다. 아이는 자주 물었다. 언제부터 학교에 갈 수 있는 거냐고, 친구들을 만날 수는 없는 거냐고. 아이의 세계가 한없이 좁아졌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바다 위에서 부유했다.
- 올리버 제퍼스, 주니어김영사 <우리가 만들어 갈 세상> 중에서
2020년의 우리는 같은 작가의 신간 그림책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바다야, 너도 내 거야>로 강렬한 충격을 선사한 올리버 제퍼스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 쓰고 그렸다는 <우리가 만들어 갈 세상>의 한 페이지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위태롭게 기울어진 배. 그런 배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아빠와 아이.
망가지지 않는 배를 만들자고, 가라앉지도, 와지끈 부서지지도 않을 배를 만들자고 말하는 그림책 속의 아빠는 2020년의 우리였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만들어 낸 파도에 휘청거렸던 2020년의 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전을 만들어 낸 우리.
거센 파도를 단단한 주먹으로 가르며 나아가는 그림 속의 배처럼 우리는 항해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두 달, 세 달씩 삼세번, 봄과 여름이 가고 세 번째로 찾아온 계절의 어느 날 우리는 선택했다. 그림책 속의 아빠와 딸이 망망대해를 지나 들어갔던 작은 오두막,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머물 수 있는 곳’이라는 우리만의 아지트. 우리는 셋 아닌 넷으로 사는 일상의 출발선에 섰다.
- 올리버 제퍼스, 주니어김영사 <우리가 만들어 갈 세상> 중에서
“우리 무얼 만들까, 너하고 나하고?”
둘째 대신 고양이, 고양이 이름은 크림이. 크림이는 우리의 시간을 뒤집었다. 2020년은 상실의 해로 기록될 수 없었다. 2020년은 반전의 해가 되었다. 아이가 지어 준 이름이 그 의미를 이미 담고 있는 듯했다. 회갈색 털에 검은 줄무늬, 새하얀 ‘크림’과는 무관할 것만 같은 새 식구는 우리의 2020년을 새롭게 설계했다.
우리는 만들었다. 크림이가 우리 집에 온 첫 날밤, 아이는 고양이 모래가 들어있던 택배 상자에 구멍을 뚫고 무릎 담요를 깔아주었다. 크림이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그 안에서 보냈다. 크림이를 위한 물건은 계속해서 날아왔고, 그 물건이 담겨 있던 택배 상자는 새로운 집으로 지어졌다. 아이는 고양이 집 전문 건축가, 크림이 전용 주택 시공자가 되었다. 아이의 설계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었다. 화장대 옆 오픈 세면대가 크림이 침실로 재탄생했다.
세 식구 입에 풀칠을 하기도 빠듯한 시기 네 번째 입이 들어왔다. 네 번째 입은 세 개의 입을 웃게 했다. 무료하고 갑갑했던 집은 사라졌다. 반강제적인 단절의 시간에서 생기가 피어났다. 우리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크림아, 여기 좀 봐 봐.”, “아빠, 우리 크림이 좀 봐 봐.”, “봤어? 방금 봤어? 우리 크림이 진짜 대단하지 않아? 어떻게 여기까지 점프를 하지?”
예측할 수 없었던 재난의 해, 예측할 수 없었던 선물이 날아왔다. 코로나는 우리 집에 크림이를 데려다주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삼각구도는 무너졌다. 우리는 거기서 다시 벽돌을 쌓아 올린다. 넷으로 사는 하루는 쉴 새 없이 많은 건축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 노동이 즐거워 어쩔 줄을 모른다.
어느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라고. 반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고양이처럼.
고양이가 가르쳐 준 일상의 진실
일상의 파괴는 창조를 불러온다. 창조의 고뇌는 활력을 증진한다. 반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고양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