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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Dec 11. 2020

족욕기 보고 울어봤니? 고양이를 키우면 생기는 일

아이는 하나 둘째는 고양이, 회사 밖에서 프리하게 삽니다


아이는 하나 둘째는 고양이 
회사 밖에서 프리하게 삽니다
ep. 01



2020년 10월과 11월,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위해 실천하고 싶은 세 가지 목표에 도전했다. 

하나, 30분 이상 운동하기. 둘, 밀가루 음식 먹지 않기. 셋, 저녁은 샐러드로 가볍게 먹기. 


코로나19로 인한 집콕 생활이 올려놓은 체중을 내려보겠다고 시작한 도전이었으나 결과는 대실패. 폭망했다. 체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매일 나의 실천 여부를 동그라미와 엑스로 표시하며 경각심을 더했지만, 남겨진 건 아주 많은 ‘엑스’뿐이었다.


밀가루 음식 먹지 않기는 압도적인 숫자의 엑스를 불러왔고, 시중의 많은 과자에 밀가루가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빵을 먹지 못하는 괴로움에 무심코 집어 든 과자봉지 뒤의 영양성분을 보니 어머나 세상에나! 포카칩에는 밀가루가 들어있지 않은 게 아닌가?


"엇! 자기야! 포카칩은 감자랑 기름으로만 만들었네? 이건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 아니다, 먹어도 되겠어!"

"아 그럼~ 당연하지. 포카칩은 생감자로 만들었다구~ 어디 보자, 밀가루 안 들은 과자가 또 없나? 나쵸는 옥수수로 만든 거네~ 꼬깔콘도 괜찮고, 내가 영양성분 보고 밀가루 없는 걸로 갖다 줄게!"







남편의 일터는 편의점, 손만 뻗으면 온갖 종류의 과자를 담을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성실하게 나의 곳간을 채워 놓았고 그렇게 11월은 어딘가 많이 이상한 도전의 달이 되었다. 밀가루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과자만 더 열심히 먹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이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더 나은 상황 아닌가? 도대체 어디가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인지 알 수 없는 한 달이 지나고 나는 결심했다. 밀가루 음식 먹지 않기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찾아온 12월, 나는 다시 세 가지 목표를 두고 고민했다. ‘하나, 30분 이상 운동하기는 당연히 늘 하는 거고. 둘, 음… 이번 달에는 따뜻한 차 마시기에 도전해 볼까? 한겨울만이라도 얼음이 들어간 음료는 피해보는 게 어떨까? 하루아침에 얼죽아 인생을 청산하기는 어려울 테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지 않기보다는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기가 나을 거야. 그럼 셋, 마지막 세 번째는? 도무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이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어 이러고 있는 우리가 우습기도 했으나 어쩌겠는가. 우린 지금 진심인데? 나의 한 달이 달려있는데?! 나는 먼저 정한 두 가지 목표를 브리핑했고, 그는 끄덕끄덕 동의하며 의견을 냈다. "당신 겨울만 되면 수족냉증 때문에 고생하잖아. 하루에 다만 10분이라도 족욕하기는 어때? 우리 집에 족욕기도 있잖아~"








그렇게 12월의 목표가 정해졌다. 일명, ‘체온을 올려라! 보온 패키지’.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나는 기상 직후 30분 홈트레이닝으로 땀을 낸 뒤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열었다. 그리고 저녁 9시 30분 때가 왔다. 나는 겨우 10분 족욕을 위한 준비과정을 야심차게 시작했다. 


1.     화장대 밑 수납장에서 5년 넘게 잠자고 있던 족욕기를 꺼낸다. 

2.     소복한 먼지를 샤워기로 깨끗이 씻어낸다. 

3.     물을 받는다. 물이 다 찰 때까지 샤워기를 붙잡고 기다린다.

4.     물이 꽉 찬 족욕기를 화장실 밖으로 꺼내려 시도한다. 이제는 팔지도 않는 뉴토브 족욕기의 무게가 상당하다. 이걸 낑낑대고 들기가 귀찮아진다. 잠시 고민하다 남편을 호출한다. 

5.     “자기야~~~ 일로 좀 와봐~~~”








그는 거대한 족욕기를 컴퓨터 책상 아래 가져다줬다. 그리고 20분 뒤 책상 아래 있던 족욕기는? 나는 다시 그를 불렀고, 그는 킥킥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럼 그럼, 내가 치워줘야지~ 고양이 화장실도 매일 치우는 데 이 정도도 못 해줄까! 족욕하라고 얘기했을 때부터 생각했어. 족욕기에 물 받아서 준비해주고 그거 다시 버리고 닦아 놓는 건 내가 해줘야겠다고.”


애완동물을 키우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던 그와 애완동물은 절대 안 된다고 선을 그었던 나. ‘내 팔자에 애완동물은 없는 건가 봐.’ 풀이 죽어서 귀여운 동물들의 영상을 시청하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던 그에게 ‘고양이를 키워도 좋다.’ 허락을 해준 뒤 나는 왕이 됐다. 그는 노심초사 나의 안색을 살피며 바쁘게 움직였고, 나는 그런 왕놀이를 조금 즐기던 참이었다. 


“고양이를 키우게 해 주면 족욕 수발도 받을 수 있는 거야?” 우리는 깔깔 웃었고, 다음날 저녁 나는 울었다. 그와 아이가 둘만의 산책을 나간 뒤 크림이랑 나만 남아 있던 우리 집에서. 전날 저녁 사용하고 물기를 말린다며 화장실 앞에 그대로 놓아두었던 나의 족욕기 앞에서. 노트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다 번뜩 떠오른 족욕 생각에 물을 받으러 간 나는 발견한 것이다. 이미 가득 물이 담겨 있는 족욕기를, 그 앞에 가서 보기 전까지는 물이 차 있는지도 몰랐던 족욕기를 말이다.







언제 여기 물을 받아두고 갔을까. 여기 이렇게 물을 받아두고 가는 사람의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2006년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그날부터 2020년 오늘 이 순간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사랑의 방식이 떠올라 울컥 목이 메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은하수처럼 쏟아졌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나 어리둥절해지게 만드는 사람, 내가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아도 되나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사람. 


동물은 절대 싫다고, 털 날림은 어쩔 거냐고, 내가 냄새에 예민한 거 모르냐 견고하게 세워두었던 방어막을 허문 건 단지 아이가 아니었다. 고양이는 그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기도 했다. 크림이가 우리 집에 온 뒤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크림이를 보며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일이다. 











                                                                                                                                                              

▲ 예방 접종을 하러 가는 날의 스웨그

베란다에 나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 크림이를 보고 “저기 춥지 않을까? 지금 밖에 영하라는데?” 걱정하는 나에게 분명 “에이, 쟤들은 한 겨울에도 밖에서 사는 애들인데~” 말했던 그가 아니었는가.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동물병원을 가면서 “우리 크림이가 추우면 안 되니까” 저 거대한 담요를 얹어 멘 그가 귀여워 나는 또 웃는다. 고양이를 키운다는 건, 고양이처럼 깜찍한 모습의 남편을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것.









 
[고양이가 가르쳐준 일상의 진실 ]

마냥 귀찮던 족욕도 즐거울 수 있다.
너와 함께라면.

족욕기를 보고도 울 수 있다.
그와 함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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