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감사했지만 역량을 다 펼치지 못했다. 발품을 팔아 의상과 디자인이 함께한 졸업작품을 만들었고 옷가게 사장으로 취업했다.
사장이라니 신선한 일이었다. 옷도 좋고 옷을 보러 가는 것도 좋고 옷이 좋은 20대였다. 장사는 마음과는 달리 즐겁기만 하진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옷을 보는 일은 지치지 않았으나 정상가격 구매로 이어지기엔 스킬이 부족했다. 내가 맡게 된 옷가게는 친구들이 계약한 가게를 이어받아 건물폐업 전 6개월 정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어떤 교수님의 소개로 신문사에서 광고디자이너로 투잡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각디자인 일이 시작되었다. 부업으로 시작한 시각디자인일은 생각보다 나와 잘 맞았다.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디자인회사로 이직에 성공하고 나는 14년 동안 디자인 일을 하게 되었다. 큰 체력소비도 없었고 수정이 무한 반복되는 나에겐 도파민 같은 새로움의 작업이었다. 로고 제작, 지역 축제, 교육청 디자인의 포스터나 팸플릿 소식지, 선거와 관련된 책자 등을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디자인은 너무 재미있었으나 일과 삶의 균형은 쉽지 않았기에 코로나라는 좋은 기회로 방과후 미술교사가 되었다. 방과 후 미술교사는 경쟁률이 센 직업이었다. 코로나 덕분에 이직에 성공한 셈이다.
미술시간,아이들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미술선생님?" '내 꿈은 미술선생님이었네?'
대답하다가 생각이 났다.
"선생님은 꿈을 이루었네요?"
"그러네? 너희도 꿈을 이룰 수 있어!"
선생님이라는 명칭이 처음엔 부담스러웠고 좋을 영향력을 줄 수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특활활동으로 미술을 했다. 학교에서 내가 봤던 미술선생님들은 단답형이었다.
그려봐. 그려. 이게 다였다. 2분도 알려주는 꼴을 못 봤다. 스스로 그리는 시간을 가질 뿐이었다.
나는 디자인 회사에서도 알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신입직원들을 알려주거나 상사와 상의하며 일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함께 일했던 사장님께서는 강사일을 권유하셨는데 제가 무슨 강사예요. 라며 손을 절레절레했었는데 이 일을 하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