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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티에 May 19. 2016

위안부 할머니의 입을 막은 것은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기


얼마 전 "썰전"에서 유시민 작가가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과 관련해 한 말 중 하나가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


그는 "귀향"이 단순히 일본의 제국주의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라고 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위안부의 실체에 대해 입을 연 사람은 김학순 할머니로 때는 1991년 8월이었다. 해방 후 4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분들은 피해자잖아요. 뭐가 그 할머니들로 하여금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도 그 말을 못하게 했는가?


심리학에서 "피해자 탓하기 현상"(Blaming-the-Victim Phenomenon)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어떤 안 좋은 사건 사고가 생겼을 때 그 원인의 일부 혹은 전부를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이다. 너무나 비도덕적인 처사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인간은 이성적, 합리적이고 싶은 동물이다. 인간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원인과 결과를 알고 싶어한다. 그래야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과관계를 낱낱이 파악하기 힘든 엄청난 사건, 사고가 벌어지면 인간은 참을 수 없이 불안해 진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를 둘러싼 세상'이라는 예측가능한 안전지대가 갑자기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갑자기 저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의식을 지배할 수도 있다. 그때 인간의 방어기제는 인간의 심리를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라는 손쉬운 먹이감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면 상황은 간단해진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헤아리려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도 없어지고, 또 '나에게도 저런 일이 닥치면 어쩌나'하며 불안에 떨 이유도 사라진다. 피해자가 잘못했기에 생긴 일이고 나는 그 피해자처럼 멍청하거나 그릇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탓하기"는 특히 피해자가 사회적 약자일 때 더욱 쉬워진다.


위안부들은 여자였다. 게다가 대부분이 십대의 미성년자였다.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약자인 셈이다.


그분들은 피해자잖아요. 피해자인데 우리 사회 내부에서, 일본군들의 만행에 피해를 당하고도 피해를 당한 분들이 피해를 입은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는 억압적인,
가부장적인 분위기, 이런 것이 수십 년간
지속됐다는 거 잖아요.


유시민 작가는 말한다. 할머니들이 일본군의 만행에 당한 고통 못지않게 오랫동안 침묵해야 했던 고통에 마음이 아프다고.




프랑스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 전시됐던 위안부 만화를 토대로 제작한 만화책 삼부작 중 "나비의 노래"에서는 한 할머니가 위안부였던 과거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에 대해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어머니의 과거를 세상에 알린다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냐며 반대하는 아들에게 할머니는 말한다.


남자들은 걸핏하면 국가입네 민족입네 거창하게 얘기하지. 강제로 끌려가서 당한 우리만 죄인이고. 불문곡직하고 여자는 순결해야 한다는 게 남자들 생각이야. 우리가 정신대로 끌려갈 때 한국 남자들은 뭘 했는고? 그래 놓고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남자들이지.


위안부로 말 못할 고초를 겪은 후 기적적으로 한국에 살아 돌아와서 만난 할머니의 남편은 할머니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갔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남편이 할머니에게 보여준 것은 눈물과 위로가 아닌 폭력과 욕설이었다. 남편은 할머니를 "갈보", "화냥년"이라고 부르며 둘 사이의 자식들까지도 진짜 자신의 자식이 맞는지를 의심했다.



위안부로 등록된 할머니 이백 몇 십 명을 뺀 수많은 할머니들은 한을 안고 소리 소문없이 죽거나 외롭게 살아가것제.
그넘들이 끌어다가 쓰고 싶으면 쓰고, 아프고 병들면 처분해 버리고... 정말 골병들었다.
그렇게 해 놓고 돌보지는 못할망정 우리보고 매춘부라 카니...억장이 무너지는데 우예 눈을 감겠노...


해방 후 46년도 여성의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많은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들은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또 다시 한 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어떤 장소에 있었는지, 또 평소에 이성관계가 어땠는지 등의 사건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이슈들이 도마 위에 오른다. 가해자의 삶이 아닌, 피해자인 그들의 삶이 낱낱이 파헤쳐지고 평가받는다. 이것이 아직도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는 이유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성폭력 신고율은 아직도 10% 정도에 머물고 있다. 피해자들의 절대다수는 아직도 사회적인 침묵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2012년 통영에서 일어난 10세 여아 강간살해사건은 전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다. 가해자 김점덕은 범행의 동기를 묻는 경찰에게 경악스러운 답변을 내놓았다.


피해자 한 양이 "짧은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어서" 순간적인 충동을 느껴 집으로 데려가 성폭행하려다 살해했다는 진술이었다.


무엇이 이 남자에게 이토록 후안무치한 궤변이 그럴싸한 범죄의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든 것일까.


오늘 밤 다시 한 번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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