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생이세요? 만으로 몇 살이지? 띠가 어떻게 돼요? 그럼, 몇학번 인거야?
"세상은 온통 수학이야. 삶을 이해하기 위해 수학을 배워야 해."
요즘처럼 이 말이 다가온 적이 없다. 숫자로 증명한다. 팔로워 수가 온라인 속 나를 입증하고, sr지수가 아이를 대변다. 굳이 몇 학년, 몇 살을 물어볼 의미가 없다. 세상이 궁금한 건 숫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므로.
"뼈 나이는 3년 빠르네요. 피검사 원하시면 신청하세요. 한 시간 반 소요되고,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옵니다."
저체중아로 태어난 둘째가 등 떠밀려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사 선생님 말씀에 불안 병이 도진 엄마가 급히 예약을 잡아 하교 후 종종걸음을 걷게 했다. 병원에 가기 전, 간식으로 색색의 방울토마토를 챙겨 왔는데 진료실에 들어간 순간 방울토마토가 완숙 토마토가 되었다. 그 작은 방울방울은 어느새 묵직한 모양새를 자랑하더니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손목에 힘이 풀려 더 이상 무게를 견디지 못하도록.
작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 진료를 급히 잡았던 건, "괜찮네요. 조금 더 지켜보며 생각해 보죠."라는 확답을 듣고 싶었다. 엄마가 되면 이상한 병에 걸리게 되는데, 알고 있어도 주기적으로 신경안정제가 들어간 말을 들어야 한다.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괜찮아"라는 주사를 처방받아야 살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 모든 엄마는 신경성 두통을 붙들고 살테니깐.
이쯤 되니 억울하다.
핸드폰 사진첩엔 '밥'이라는 폴더가 따로 있다. 아이들 식판을 차려주며 전날 먹은 음식과 겹치지 않도록 사진을 찍었던 게 몇백 장의 기록이 되었다. 그만큼 집밥에 진심이다. 간식 또한 건강식으로 챙기려 노력하는데, 당근 오이 스틱, 삶은 메추리알, 제철 과일을 싸 들고 다니며 놀이터 보모 역할을 했다. 놀다 보면 내 아이만 쏙 빼내서 건강식을 먹일 수 없으므로 넉넉하게 챙겨간다. 놀다 지친 아이들에게 과일꼬치와 함께 잔소리를 건넨다. "이런 게 건강한 거야. 좀 더 먹어봐, 먹다 보면 맛있어, 몸도 건강해지고."
옆집 아줌마가 와서 하는 소리라 그런가 맛없어 보여도 한 번씩 드나들며 먹는 아이들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친구들 먹는 속도에 내 아이가 먹는 양이 현저히 줄긴 하지만 그래도, 몸도 마음도 건강히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스민다.
이렇게 지냈는데. 깨끗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갖다 바친 간식과 밥이 몇 낀데. 작은 것도 모자라 뼈가 빠르단다. 것도 무려 삼 년이나.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공든 탑도 무너진다'가 되었다. 적어도 지난 노고를 알고 있다면 제 성장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하다 하다 보이지 않는 뼈 나이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늙은 엄마 뼈 나이에 가속도가 붙는다.
잠든 아이 손을 잡는다. 하루 종일 엄마 눈치 봤을 이 작은 아이 마음은 어땠을까. 본인이 노력한다고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에 엄마마저 동조하는 기분을 느꼈을 아이. 가끔 드는 생각이다. 둘째를 너무 귀여워 한 나머지, 아이가 자라는 속도가 느린 걸까. 참새 같은 쫑알거림을 너무 사랑해서, 내 귀여운 아가는 날지 못 하는걸까.
각종 등수와 점수로 평가되는 아이들을 보며 온전한 사랑을 생각한다. 이 아이에게 부여된 점수를 모두 제거한 상태에서 순순히 바라보는 사랑. 아낌없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숫자를 부여받는다. 영유아 검진에서, 개월 수 발달 표에서, 등수에서, 석차에서.
세상은 숫자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요즘, 엄마라도 수학과의 전쟁에서 승리 해야겠다. 나만의 잣대로 널 볼 수 있도록 중심 잡고, 태어난 자체로 사랑해야겠다. 넌 숫자로 증명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내게 온 거야. 그래서 우리가 만난 거야. 널, 이렇게 사랑하려고. 존재 자체로 사랑받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