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메이커.
나는 만드는 사람이다.
과거 푸드스타일리스트였기에 음식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 기고를 했던 내가 다른 의미의 메이커가 되었다.
그 창대한 이름은 바로 트러블 메이커.
"똑바로 읽어."
어젯밤 푼 문제집을 채점하며 빨간펜이 죽죽 그어진다. 주말이다. 나도 안다. 하지만 다른 일정들을 생각해 보니 지금 공부를 마무리 지어야만 가능할 듯 하다. 오만가지 인상에 고개는 반쯤 돌아가고 흐느적거리며 의자에 앉는 아이를 봤지만, 모른 척 문제를 읽으라 했다. 뻔히 예상된 대로 그 태도에서 반듯한 목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고 결국 아이의 성의 없는 웅얼거림에 차가운 말이 나왔다. 그리고 바로 맞받아치는 아이.
"내가 기계야?"
이게 지금 뭐라는 거지. 똑바로 읽으라는 소리에 반항기 가득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엄마를 올려보고 있다니.
곧이어 남편의 제지가 들어왔다.
"일주일 내내 이랬을 거 아냐. 지금 주말이야. 너도 얘도 좀 쉬어."
"....."
"내가 할 테니, 일단 애한테 시간 좀 주자."
아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서다. 할아버지 댁에 가서 하룻밤 자고 싶고, 야구도 해야 하고, 사촌을 만나 키즈카페도 가려면 주말 오전 시간이라 할지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악역을 맡는다. 하기 싫은 아이를 앉히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마무리 지어 놓아야 한다, 얘기를 하건만 오늘도 1 vs 3에 가로막혀 나 홀로 외침에 굳어간다.
그렇다. 그들과 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중재 역할을 하는 남편은 햇살이고, 학습을 시키는 나는 악역이다. 하루 이틀로 끝낼 일도 아니다. 매일, 매시간 습관처럼 공부를 봐주고 끌고 가는 게 어디 쉬울쏘냐. 해야 함을 모르는,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를 그럼에도 끌고 가는 나날이 점점 힘에 부친다. 표정 잃은 저녁 시간. 누구를 위한 석양인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포기가 안 된다. 포기할 수 없다, 부모라면.
내 아이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매번 적당한 줄다리기를 하며 습관을 만들어주는 일상에 난 트러블 메이커 역할을 얼마나 해야 할까. 아이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끌고 있는 아슬한 줄다리기가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일이 맞을까.
학원은 가기 싫고, 성적은 잘 나왔으면 하고, 단원평가 예고가 있을 때면 "나 잘할 수 있겠지?" 묻는 아이다. 같이 공부했으니 할 수 있을 테고, 못 보더라도 그간 열심히 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말해도 좋은 성적을 바란다. 뿌듯한 점수를 받고 해사한 얼굴을 보이며 "엄마 고마워, 공부 가르쳐줘서. 학교에서 배우는 게 이해가 잘 돼."라는 아이의 쑥스러운 고마움을 들을 때면, 그간의 노력이 아이 웃음에 밑바탕이 되었음에 노곤한 뿌듯함이 몰려온다. 하지만 그 순간은 화려한 불꽃처럼 찰나이며 다시 화약 포를 매만지며 대낮의 뜨거운 햇살을 견디는 나날이 이어진다.
아이는 모른다. 왜 해야 하는지도, 힘들어도 꾸준히 해야 하는 이유도.
아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공부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이 나오길 바란다.
학생 신분이 지속되는 한, 아니,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을 통틀어서 공부는 지속할 수밖에 없다. 작은 성취들이 모여 큰 성과를 불러오기도 때론 그에 못 미치는 나날이 이어지며 부서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과거 성취했던 기억이 몸에 각인돼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언제까지 엄마가 옆에서 봐줄 수 없기에, 하고 싶은 일을 마음 편히 하기 위해선 하기 싫은 마음 단속도 해야 하는 것임을 일러주지만 나만의 아등바등함이 느껴지는 날에는 이 또한 외면하고 싶다.
내려놓음이 과연 가능할까. 부모라는 직업에서 내 아이의 행동, 습관에 내려놓는 순간이 과연 오기는 할까.
집에서 아이를 관리하는 이유는 부모의 테두리가 없는 환경에서도 스스로 해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나마 부모 말이 다른 한 귀로 빠져나가기 전에 수만 번 외치려는 것인데.... 그것이 맞는 일인지 헷갈린다. 내가 없으면 웃음이 끊이질 않을 그들을 보고 있자니, 오늘도 트러블 메이커는 어디서 위로받아야 하는 것인지, 빈 화면에 속마음을 끄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