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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용 Jan 12. 2020

오늘도 쓸 만한 하루

쓸모없는 글 덕분에 나의 하루는 조금씩 쓸 만한 것이 되어간다.

카피라이터란 사무실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음미하며 키보드 앞에서 여유롭게 카피를 쓰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었다. 딱, 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현실은 커피고 뭐고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키보드 앞에서 무엇이든 써보려고 골몰하는 게 주된 업무였다. 좋은 아이디어 어디 없나. 괜찮은 카피는 어떻게 쓰나. 고민만 하다가 집으로 퇴근하기도 부지기수. 팀장님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카피를 출력해놓고는 전전긍긍하기도 일상다반사. 그렇게 쥐어뜯은 머리가 꽤나 늘어가다 보니 나는 어느새 광고대행사에서 7년째 일하고 있는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그래도 이 카피는 좀 아닌 것 같은데..."

팀장님이 말한다. 광고주가 묻는다. 소비자가 댓글을 올린다.


나란 카피라이터에게 실패는 익숙하고 성공은 까다롭다. 많은 순간 나는 업무에 허덕이고, 때론 하나도 쓸 만한 무언가를 만들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간다. 그럴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건 자괴감이었다. 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나를 괴롭혔다.


카피라이터의 글쓰기는 늘 목적이 있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써내야만 하는 주제가 있고,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반드시 매료시켜야만 한다. 나는 회사에서 늘 무언가를 쓰고 있었지만, 그곳에 나를 위한 글쓰기는 없었다. 나는 지쳐있었다.


그즈음부터였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혼자서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팀장님이 흡족해할 글도, 광고주가 좋아할 카피도, 광고에서 사람들을 현혹시킬 슬로건도 아니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회사에서 무언가를 쓰다가 지친 마음을 다시 글쓰기로 해소하다니.


하지만 나 홀로 끄적이는 글은 카피라이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상사에게 못 쓴다고 핀잔을 들을 일도 없고, 광고주로부터 일일이 컨펌을 받을 필요도 없고, 아무도 좋아해 주지 않아도 그만인 글이었다. 그저 나만 좋으면 그만인 글이었다. 카피라이팅과는 다르게 어떤 수익도 가져다주지 않는, 어쩌면 쓸데없는 글쓰기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는 글쓰기였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선택의 가능성들> 중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시를 쓰지 않는 어리석음보다 시를 쓰는 어리석음을 더 좋아한다."

나는 그의 문장에서 '시'를 '글'로 바꾸어 읽어본다. 바보 같은 글이어도 좋다. 시시껄렁한 글이라도 괜찮다. 스스로가 무용하게 느껴지는 밤이 이따금씩 찾아오지만,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나를 위로해준다. 나는 무엇이든 쓸 만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매일 쓸 만한 것들을 찾아내고 발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쓸모없는 글 덕분에 나의 하루는 조금씩 쓸 만한 것이 되어간다.

그 사실이 좋아서, 나는 오늘도 쓴다.




photo by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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