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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훈 May 23. 2022

호텔 조식을 먹기 전에
샤워를 하는 이유

 이곳은 이른바 ‘5성급 호텔’입니다. 계획했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일어납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립니다. 옷을 잘 입는 사람은 아니지만, 단정하게 입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조식당으로 향합니다. ‘오늘의 조식당 베스트 드레서’ 같은 것에 뽑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여행을 마친 후에 ‘비싼 숙박비를 지불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어요’ 같은 아쉬운 후기를 남기지 않기 위함입니다. 즉 이 숙박을 만족스럽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식을 먹기 전 샤워를 합니다. 도대체 샤워와 만족스러운 숙박이 무슨 관계냐고요?


<단촐하지만 충분한 아침 - Suiran Luxury Collection Kyoto>


 IMAX로 촬영한 영화는 ‘Watch a movie, or be part of one’이라는 문구와 함께 시작합니다. 영화 속 상황들이 실제 내 앞에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감동과 흥분은 배가 됩니다. 숙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된 숙박 경험은 ‘내가 어떤 투숙객이고 싶은지’를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숙박할 호텔을 상상하고, 그 호텔을 ‘잘’ 즐기는 투숙객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에 몰입합니다. 호텔 인테리어의 톤을 고려해 옷을 챙기고, 해당 호텔의 격에 맞는 행동을 연습합니다. 호텔의 일부가 되어보는 경험입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이 호텔의 일부가 되어보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 만족만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객실이나 수영장 사진을 SNS에 올리는 목적 중에는 '나는 이런 곳에서 숙박하는 사람이야'라는 걸 보이기 위함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뭘까요? 실제로 이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닐까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저는 호텔의 등급과 가격이 사람의 격을 가름할 수 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사람에게 격을 매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 글은 그저 '비싼 돈 주고 하는 숙박을 좀 더 만족스럽게 만드는 법'에 관한 잡담입니다.


<Watch a movie? or be part of one - IMAX Pre-show Countdown>


 다시 조식당의 이야기입니다. 아침밥 따위를 위해 나를 치장할 필요는 당연히 없습니다만, 떡진 머리와 늘어난 브이넥, 맨발과 슬리퍼는 굉장히 곤란합니다. 조식 시간에 늦을까 다급히 도착한 잠옷차림의 투숙객은,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신경쓰일 겁니다. 찔리는 마음에 직원들이 나에게만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요. 밥은 편안하게 먹어야 합니다. 다만 이건 몸의 편안함 뿐 아니라 마음의 편안함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샤워를 하고, 드라이만 하더라도 마음 편히 여유롭게 조식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옷을 입고도 등산을 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등산복을 갖춰 입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지요. 스펀지밥이 그려진 샛노란 잠옷 바지 대신 단정한 면바지를, 객실 슬리퍼 대신 예쁜 내 신발을 신어 보세요. 바로 수영장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냐고요? 래시가드 위에 얇은 셔츠라도 하나 입어보심이 어떨까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꽤나 있어 보임에, 리조트와 상당 잘 어울리기에, 모닝커피 맛도 괜히 더 좋아집니다. 진짜로 멋있는지 여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가 나에게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입니다. 덤으로 더 예쁜 사진을 남길 수 있음도 물론입니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조식당 테이블에 여유롭게 자리 잡은 뒤, 이번엔 로컬 푸드에 도전합니다. 이곳이 랑카위의 고급 리조트라면, 매번 원가를 생각하며 의무감에 뜨는 ‘에그 베네딕트’와 ‘훈제연어’를 잠시 미뤄두고, ‘나시 르막’과 ‘락사’에도 도전합니다. 하이난이라면? ‘요우티아오’와 ‘또우장’을 맛봅니다. 빈 접시를 치워주는 직원에게 ‘너희 음식 정말 맛있어!’라는 느낌을 담아 엄지를 치켜올립니다. 일정에 문제가 생겼다면 해결책을 인터넷에서만 찾지 말고 컨시어지와 함께 고민합니다. 한국인에 유명한 외부 업장도 좋지만 이번에는 호텔 스파를 이용해 봅니다. 투숙객 할인에, 교통비와 이동시간을 생각하면 그렇게 비싸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출출한 밤에는 고이 모셔온 육개장 사발면 대신 룸서비스가 어떨까요. 룸서비스가 좋은 거 누가 모르냐고요? 비싸서 문제라고요? 애초에 호텔 스파와 룸서비스까지 무리 없이 이용 가능한 금액대의 호텔을 고르면 됩니다.


<가끔은 호텔 바에서 야식을 - Park Hyatt Bangkok>


 이처럼 몰입은 스스로를 더 멋진 투숙객으로 만들고, 숙박 자체를 더 기억에 남게 해 줍니다. 방이 넓었고, 수영장이 컸고, 조식이 맛있었다 같은 ‘호텔에 관한 기억’이 아닌, 그래서 내가 거기서 뭘 했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와 같은 ‘나에 관한 기억’을 남기는 거죠. 물론, 몰입만으로 모든 숙박을 좋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분명 호텔의 몫이 있습니다. 호텔의 응대에 문제가 있을 수도, 호텔의 시설이 기대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내가 어쩌지 못하는 외부 요인입니다. ‘어디 한번 날 만족시켜봐’라는 태도로 접근하면 내 숙박의 만족도 전부를 호텔에 위임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스스로 좋은 투숙을 만들기 위해 몰입하는 편이 비싼 돈을 들여 좋은 호텔을 선택한 여행자에게 더 적합한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조식당에서 매니저와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는 다른 투숙객을 보고 부러워만 하지 않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오늘 하루 어땠냐고 물어오는 컨시어지의 직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몰입했으니까요.





 몰입의 경험은 다른 종류의 여행에도 쉽게 적용가능합니다. 방콕 카오산 로드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여행자의 자세를 생각해봅니다. ‘자유분방하고, 다른 문화를 겸허히 수용할 줄 알며, 용감히 새로움에 도전하는’ 이상적인 배낭여행자 역할에 몰입해봅니다. 공용공간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소통하고, 도움을 주고받고, 불편함은 적당한 음주로 잊으며 두근거리는 게스트하우스 숙박을 만끽합니다. 게스트하우스에 리모와 캐리어를 끌고 도착해서는 ‘침구가 더럽습니다’, ‘복도가 시끄러워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같은 후기를 남기는 건 몰입을 하지 못했기 때문도 있을 거에요. 여행은 일상이 아니니, 여행자에겐 적당한 연극이 필요하겠죠. 이러나저러나 필요한 것은 몰입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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