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셀스 Aug 16. 2022

한국의 경계 안에 있기

미국과 한국의 경계에서 II

너는 누가 봐도 FOB이야 


FOB(Fresh Off the Boat)는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외국인을 의미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에 와서 살고 있지만 아직 미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상태의 외국인을 말한다. 미국에 오고 한 2년 정도는 이 말을 많이 들었다. 대화를 굳이 나누어보지 않고 입은 옷이나 화장만 봐도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보인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이 좋았다. 한국인이 한국인처럼 보인다는 게 왜 그렇게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누가 봐도 한국에서 온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좋다. 


그래도 유학 초반에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했던 것 같다. 영어 실력을 향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식 예의나 트렌드를 잘 알고 따라가야만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외국인처럼 보여서 득이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학과 대학원은 외국인 비율이 높기 때문에 학교 생활 초반에는 쉽지 않았다 (한국인도 참 많다). 특히 코로나가 터지면서 그나마의 학교조차 잘 가지 않게 되었다. 영어가 늘고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 온 지 3년이 지난 이후였던 것 같다. 국제기구에서 일을 시작하고 미국인 남자 친구의 친구들과 종종 만나면서 비로소 미국 생활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너 이제 미국인 분위기 좀 나


미국으로 들어가는 경계선을 넘어보려고 노력하다가 잊어버린 것이 있었다. 나는 한국의 경계선을 넘어 나오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1년 반 만에 한국을 찾았을 때 친구들이 한 말이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27년을 살았는데, 고작 미국에 3년 살았다고 미국인 분위기가 나는 게 말이 되나. 나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미국 문화 흡수 여부와 상관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가 3년 간의 공백 동안 나를 상당히 밀어낸 것은 사실이었다.


네이버 뉴스를 챙겨보고 인기 있는 드라마를 본다고 해서 한국에 사는 친구들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접하는 한국은 자극적이거나 젊다. 미디어에서는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 혹은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한다. 하지만 한국에 있었을 때 내가 속했을 법한 곳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평범한 직장인 사회이고, 그들의 관심거리는 내가 미디어에서 주로 접하는 내용과는 달랐다. 마트에서 장 볼 때 달라진 점, 직장 내 복지, 청약, 월급 저축 방법 등 보다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내용을 이야기할 때 나는 할 말이 많지 않았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다가 한국 생활에서 점차 멀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1. 영여 실력은 늘리되 한국어 실력 유지하기 


평생 한국어만 쓰고 살았는데 고작 몇 년 외국에 살았다고 한국어 실력이 줄어드는 게 웃기긴 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언어 실력은 매우 빠르게 변한다. 실제로 미국에서 만난 유학생들이나 이민자들은 한국어를 사용할 때 영어를 굉장히 많이 섞어서 사용한다. 나도 종종 위기감을 느낀다. 처음에는 남자 친구가 어려운 한국어 단어를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영어 단어로 말해주면서 시작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국민연금'과 같은 표현은 모를 것이라 생각하여 'social security'라고 말해주는 등 영어 단어를 포함하면 대화가 수월해지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다. 


게다가 나는 직장 경험을 미국에서만 했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어로 일하는 방법을 모른다. 이메일 또한 대학생 때 교수님께 보냈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보낸다. 업무 파트너에게 연락해서 양해를 구하거나 민감한 사항을 전달하는 등의 업무가 한국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른다. 전공 공부도 영어로만 하기 때문에 한국어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대화를 할 때 한 가지 언어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영어를 쓰거나 한국어를 쓰거나. 영어만 쓰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늘 의식하고 노력하면서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곳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대화 도중 갑자기 한국어가 튀어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한국어로 대화할 때 영어를 쓰지 않는 것은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고 또 많이 사용한다. 따라서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상대가 영어를 많이 섞어 쓰는 경우에는 나 또한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쉽지 않다. 이렇게 가다간 한국어 실력은 줄어들고 영어 실력은 그다지 늘지 않아 '0개 국어'의 상태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점점 커진다. 


2. 한국과 미국의 트렌드 모두 따라가기


극강의 난이도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다. 한두 살만 더 먹어도 나는 '대세'인 세대에서 빠르게 밀려난다. 고작 23살만 되어도 대학에서는 거의 화석 취급을 받는다. 조금만 한 눈을 팔아도 유행에 뒤처지는데, 무려 외국에서 몇 년을 살면서 이 트렌드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욕심을 계속 부리고 싶다. 


미국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은 더 어렵다. 사실 미국에는 트렌드라는 것이 없다. 애매하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즐기는 것이 꼭 트렌드는 아니다. 미국 안에는 정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기 때문에 각 지역 사회별로 유행하는 것도 다르다. 미국의 한인 사회 내에서도 LA 한인 사회와 뉴욕 한인 사회 간에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국 트렌드를 따라가고자 하는 것은 적어도 미국인들과 원만한 교류가 가능해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이다. 최근 많은 이들을 공포에 빠지게 한 여러 총격사건이나 BLM(Black Lives Matter) 운동 등, 놓쳐서는 안 되는 이슈들만이라도 꾸준히 따라가고자 한다. 

 

3. 한국과 미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 챙기기


지금 친구들 연 다 끊어질 걸요?


유학 오기 직전 만났던 유학생 선배가 했던 말이다. 미국 출국 전에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기 위해 여행을 갈 예정이라고 하자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단호해서 진짜 그러려나 걱정이 되었다. 유학 4년이 지나고 5년 차에 접어드는 지금, 나와 연이 끊어진 친구는 없다. 


나는 친구가 그렇게 많지 않다. 기준에 따라 많은 것일 수도 있지만. 친구들에게 마음을 완전히 여는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깊이 친해지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진짜' 친구는 많지 않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친구들과의 연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한국에 있는 나의 친구들은 대부분 오래된 친구들이다. 감사하게도 같은 동네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나온 친구들이 아직도 우리 동네에 살고 있다. 재수생 때 만난 친구들과 대학 시절 알게 된 친구들도 이제는 십년지기가 되었다. 이들과는 한국에 갈 때마다 만난다. 1년에 한 번, 혹은 2년에 한 번 만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연이 끊어질까 두렵지 않다. 


나 오늘 참깨라면 먹을지 신라면 먹을지 정해줘


1년 만에 만난 동네 친구가 날 보고 처음 한 말이다. 나는 1년 동안 못 만났는데 날 보고 처음 떠오르는 말이 고작 그거냐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막 어제 만난 사이처럼 여전히 가까웠고, 물리적으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어색해질 리 만무했다. 언제 마주해도 늘 함께 있던 것처럼 편안한 사이가 된 거다. 진짜 친구는 자주 만날 필요도 없고 멀어질까 고민할 필요도 없구나. 유학 가서 친구를 잃을까 걱정했던 나 스스로가 민망해졌다. 


비교적 최근에 사귄 친구들은 대부분 미국에 유학 와서 만난 친구들이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비자나 영어 문제 등을 함께 의논하고 공감하기가 쉽다. 지금 내 상황을 가장 잘 공감해줄 수 있는 친구들이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내가 대학교에서 공부하기 때문에 대학생처럼 방학을 즐길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국에 사니까 풍요롭게 꿈을 좇을 수 있지 않냐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은 나의 현재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래서 한국과 미국에 있는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 필요한 존재들이고, 나의 부족한 부분을 늘 채워준다. 


하지만 양 쪽의 친구들을 모두 챙기는 것이 어렵다.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한국에서 만나자고 제안할 때, 마냥 좋지만은 않을 때도 있다. 제한된 시간 안에 나의 오랜 친구들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은데, 미국에서도 볼 수 있는 친구들을 꼭 봐야 하냐는 생각도 가끔은 한다. 한국에 최대한 자주 방문하고 싶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다. 비행기 표값이 아주 비쌀뿐더러, 여러 비자 관련 문제로 미국을 나갔다 올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따라서 양국에 있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알뜰살뜰하게 챙기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작년에는 가장 아끼는 동생이 한국에서 결혼을 했는데 코로나와 비자 관련 문제가 생겨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인간관계와 우정은 단순히 얼굴을 직접 많이 보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관계는 쉽게 끊어지지 않으며, 몇십 년을 보지 못해도 지속될 수 있다. 실제로 나의 어머니는 미국에 사는 고등학교 친구와 10년에 한 번 정도 만나면서도 아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다. 하지만 친구들이 더 많이 보고 싶고,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 함께 울고 싶다. 항상 나의 편이 되어주는 친구들에게 얼마나 더 많은 보답을 할 수 있을지는 나의 노력에 달려있겠지.  




미국에선 외국인, 한국에선 해외거주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정체성을 흔들 정도는 아니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지내다 보면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 내가 만난 몇몇 교포들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의 뿌리를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했다고 말한다. 남자 친구도 한국과 미국이 월드컵에서 만나면 한국을 응원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한국인보단 미국인에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또 완전한 미국인은 아닌 것 같다며 스스로 정의 내리기 힘들어한다. 


이렇게 중간에 끼인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찌 보면 명확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양 쪽 모두에 속해있는 것이다. 너무나도 다른 두 집단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적응하게 된다면 여느 한국인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생길 테지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한국의 경계선을 서서히 벗어나면서 미국으로 들어가는 경계선은 잘 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는 만족스럽지 않다. 양국의 경계선 안쪽에 모두 들어가 있고자 부단한 노력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미국의 경계 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