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게 망해볼 수 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게임 제작지원 사업,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설계가 필요하다.

by JuPD
"이 사업 망하면, 다음엔 아무도 우리 안 뽑아주겠죠?"


인디 게임 팀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거의 비슷한 말을 한 번씩은 듣게 된다. 말은 농담처럼 꺼내지만, 표정은 진지하다. 정부 지원사업에 한 번 떨어지면, 마치 국가로부터 ‘낙인’을 찍힌 것처럼 느끼는 분위기. 이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창업 생태계의 공기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라에서 운용하는 창업지원 사업의 본질은 ‘안전하게 망해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데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망해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 안전하게 망해볼 수 없는 청년들


한국에서 ‘실패’는 여전히 경력의 흠이다. “창업했다 망한 사람”은 “도전했다가 학습한 사람”이 아니라 “한 번 해보고 안 된 사람”으로 기억된다. 이력서에 창업 경험을 쓰면, “왜 망했는지 3줄 요약해서 말해보세요”라는 질문보다는 “그래서 지금은 안정적인 걸 찾으시는 거죠?”라는 질문을 더 자주 듣는다.


정부 지원사업을 한 번 받고도 성과가 안 나오면, “저 팀은 돈 줘봐야 소용없다”라는 평판이 더 쉬운 평가 방식이다.


포스트모템(post-mortem), 즉 ‘망한 뒤에 왜 망했는지 끝까지 파헤치는 과정’은 스타트업, 게임 업계에선 너무나 익숙한 단어지만, 정작 제도 설계에는 거의 들어와 있지 않다. 지금의 구조는 이렇다.


일정 기간 동안 지원금을 받는다.

결과물(게임, 서비스, 프로토타입)을 낸다.

담당자는 “매출, 다운로드, 지표”를 중심으로 평가한다.

성과가 없으면 “실패”, 성과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성공처럼 포장”.


그 과정 어디에도 실패의 원인을 차분히 파고들고, 다음 도전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드는 장치는 없다.


“망해도 된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망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는 메시지가 전달되는 구조다.



2. 게임 제작지원 사업이 특히 더 아픈 이유


게임 제작지원 사업도 똑같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하다. 게임은 본질적으로 실험의 연속이다.


유저가 이 시스템을 재밌어할지,

이 난이도 곡선이 적절한지,

이 모네타이즈 구조가 과하지 않은지,


이 모든 것은 결국 시장에 내놓고 얻은 데이터로만 배울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디렉터라도 처음부터 정답을 맞히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게임 제작지원 사업의 결과를 여전히 “출시 후 6개월 매출” 같은 숫자로만 보려 한다.


“얼마 벌었냐?”가 아니라 “왜 안 벌렸는지, 어디서 유저가 이탈했는지, 어떤 지점에서 설계가 잘못되었는지”를 끝까지 추적하는 과정이 진짜 성과여야 한다.


나는 게임 제작지원 사업의 결과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사업결과는 정량적 매출 성과가 아니라 ‘실패의 원인을 찾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에서 쌓인 경험치’여야 한다."


한 팀이 지원금을 받고 만든 게임이 매출은 거의 없었다고 치자. 하지만 그 프로젝트를 통해 이 팀이


“튜토리얼 구간에서 60% 유저가 이탈했다”

“인앱 결제 설계가 유저 몰입을 끊고 있었다”

“아트 스타일과 타겟 마켓이 엇나갔다”


같은 구체적인 인사이트를 얻고, 다음 프로젝트에 그걸 반영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면, 그게 진짜 국가 예산의 가장 건강한 사용 방식이 아닐까?



3. 지금의 지원 시스템은 ‘옵트인(Opt-in)’이다


지금 우리의 창업·게임 지원 시스템은 대부분 옵트인(Opt-in) 방식으로 설계돼 있다. 쉽게 말해,


“이 성공 공식에 맞춰 들어오면 지원해 줄게”라는 방식이다.


이미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

이미 숫자로 증명된 시장,

이미 사례가 있는 BM 구조,


여기에 맞춰 내 사업을 끼워 넣으면 가점이 붙고, 심사에서 유리하다. 결국 팀들은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성공 사례를 연구한다.

그걸 최대한 닮게 슬라이드와 계획서를 구성한다.

“우리도 이 공식을 따라가면 이렇게 성장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게 바로 성공을 따라 하는 옵트인 방식이다. 문제는, 이 구조에선 실패가 ‘데이터’가 아니라 ‘결격 사유’가 된다는 것이다. 성공 공식을 따라 들어오라고 해놓고, 실패하면 “그럼 너는 공식을 따라도 안 되는 팀이구나”라고 판단해 버리는 것. 이건 애초에 실험을 할 수 없는 구조다.



4. 우리가 정말 필요한 건 ‘옵트아웃(Opt-out)’ 구조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공을 따라 하는 옵트인 방식이 아니라, 실패 확률을 낮추는 옵트아웃 방식으로 잡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옵트아웃은 이런 느낌이다.


“정답을 따라 들어와라”가 아니라

“망할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 나가도록 도와줄게”에 가까운 구조.


예를 들어보자.


1) 실패 요인 리스트업 & 제거

게임 제작 과정에서 자주 나오는 실패 요인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타겟 유저 정의가 모호하다.

게임 코어 루프 설명이 불가능하다.

마케팅/퍼블리싱 전략이 전혀 없다.

팀 내 리소스(프로그래머, 아티스트, 기획) 밸런스가 무너져 있다.

출시 후 데이터 분석 역량이 부족하다.


옵트아웃 방식의 지원사업이란, 이 실패 요인 목록을 ‘체크리스트’처럼 제공하고,


“이 리스트 중 최소한 여기까지는 망하지 않도록
같이 점검하고 보완해 나가자”


라고 도와주는 구조다.

즉, “이 조건을 만족하면 합격”이 아니라, “이 위험요인들을 줄여가면 탈락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관점이다.


2) 한 번 망해본 팀에 가점을 주는 구조

지금은 보통 이렇다.

첫 도전 → 합격 가능성 있음

한 번 실패 → ‘아… 성과 없었구나’ 하고 평가절하

두 번 실패 → “여긴 이제 안 봐도 되겠다” 취급


하지만 옵트아웃 구조라면, 오히려 이렇게 가야 한다. 한 번 실패한 팀이 명확한 포스트모템을 제출하고, 재도전에서 어떤 부분을 바꿀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가점을 준다.


왜냐하면 이 팀은 이미 “이 방식으로는 망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 팀이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같은 패턴으로 계속 죽어본 플레이어가 결국 보스를 깨는 경우가 많다. 실패 경험은 스펙보다 강력한 학습 자산이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한 번 죽은 플레이어를 로그아웃시키는 게 아니라, 체력 회복 포션과 리트라이 버튼을 제공하는 것이다."



5. 실패의 경험치를 ‘공적 자산’으로 만드는 방법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보자. 실패를 단지 “팀 개인의 내공”으로만 끝내지 않고, 공적 자산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1) 실패 사례 데이터베이스 구축

모든 지원팀이 사업 종료 후에 의무적으로 포스트모템을 남기게 한다.

어떤 가설을 세웠는지

어떤 지점에서 가설이 틀렸는지

유저 데이터는 어떻게 나왔는지

팀 내부 의사결정은 어디서 꼬였는지


이걸 심사위원만 조용히 보고 끝낼 게 아니라, 익명화하여 후배 팀들이 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로 쌓는 것이다.


“어떤 장르, 어떤 구조, 어떤 타겟에서 이런 실수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통계가 쌓이면, 다음 세대 팀들은 같은 지뢰를 조금 더 피할 수 있다.


2) 실패 포럼, 포스트모템 공유 세션

지원사업 종료 후, 성공 사례 발표만 하는 자리는 이제 그만두고,

망한 프로젝트만 모아

왜 망했는지 솔직하게 까보고,

심사위원, 시니어 개발자, 퍼블리셔가 같이 코멘트하는


‘실패 포럼’을 정기적으로 열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중요한 건 핑계가 아니라 구조 분석이다. “우리가 열심히 못해서요”가 아니라, “튜토리얼 이후 retention 20%에서 막혔는데, 이때 어떤 개선 실험을 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같은 이야기들.


이렇게 되면, 실패는 창피한 이력이 아니라 커리어의 실질적인 자산이 된다.



6. 게임은 원래 ‘리트라이 게임’이다


게임이라는 매체 자체가 원래 실패-학습-재도전 구조 위에 서 있다.


수십 번 죽어가며 보스 패턴을 익히고,

실패 로그를 머릿속에 쌓아가며

결국 클리어하는 경험.


이게 게임이 주는 가장 강력한 재미 중 하나다. 그런데 정작 게임을 만드는 생태계는 “한 번 실패하면 끝”이라는 구조에 가깝다.


기업은 한 번 망하면 투자 문턱이 훨씬 높아지고,

팀원들은 “그래도 이번엔 안정적인 회사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흩어진다.

지원사업은 “전년도 성과” 지표를 들이밀며 다음 팀을 고른다.


이 구조는 사실상 “리트라이 없는 로그라이크”에 가깝다. 죽으면 그냥 세이브 파일 자체가 삭제되는 게임. 이건 너무 가혹하고, 무엇보다 비효율적이다. 국가가, 제도가, 정책이 게임 제작자를 도와야 한다면 가장 먼저 해줄 일은 이거 아닐까?


“당신이 망해도, 같은 이유로 두 번 망하게 두지는 않겠다.”



7. 우리가 진짜 바꿔야 할 문장 하나


결국 요약하자면, 나는 이 두 문장을 바꾸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지금의 암묵적 시스템 문장.


“성공 공식을 잘 따라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도와줄게. 다만 실패하면, 그건 당신 책임이야.”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문장.


“성공을 따라 하는 옵트인이 아니라, 실패 확률을 줄여주는 옵트아웃 구조로 당신의 도전을 함께 설계할게.”

창업지원 사업, 게임 제작지원 사업은 성공을 보장해 주는 복권이 아니다. 차라리 이렇게 정의해야 한다.


“안전하게 망해볼 수 있는 실험실”

“망한 뒤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주는 체크포인트”

“같은 이유로 두 번은 망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시스템”


이런 관점이 제도에 녹아들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겉으로만 ‘실패를 용인하는 척’ 하는 나라에 머물 것이다. 이제는 말만이 아니라, 정말로 “안전하게 망해볼 수 있는 나라”를 제도 레벨에서 설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