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에서 완생으로...
불만과 울음은 결핍과 나약함의 결과다.
불만 속 결핍에서 돌파력을 만들고, 울음 속 나약함에서 독립을 꿈꾼다.
그렇게 미생은 완생으로 나아간다.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왜 나만 여기서 제자리일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떠오른다. 일은 늘 막힌 것 같고, 통장은 늘 비슷하고, 관계는 생각만큼 따뜻하지 않다. SNS를 켜면 남들은 다 잘 나가는 것 같은데, 유독 나만 ‘미완성 파일’처럼 남겨진 기분이 든다. 이럴 때 우리는 스스로를 쉽게 몰아붙인다.
“내가 게을러서 그렇지.”
“내가 능력이 없어서 저 자리까지 못 가는 거지.”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바꿔보면, 그 불만과 울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불만은 결국 “지금 이대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마음의 언어다. 조금 더 잘하고 싶고, 조금 더 깊이 사랑하고 싶고, 조금 더 단단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거꾸로 그만큼의 ‘결핍’도 함께 드러난다. 우리 사회는 불만을 종종 ‘성격 문제’로 취급한다.
“왜 이렇게 까탈스러워?”, “그냥 적당히 만족하고 살아.”
하지만 불만이 전혀 없는 상태가 꼭 좋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완벽한 만족은 성장이 멈췄다는 말과 비슷할 수 있다. 더 궁금한 것도, 더 도전하고 싶은 것도, 더 바꾸고 싶은 것도 없다는 뜻이니까. 불만은 우리가 아직 ‘배가 고프다’는 신호다. 갈증이 있으니 물을 찾고, 목표가 있으니 방향을 잡게 된다. 문제는 불만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불만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다.
남 탓만 하며 소비하는 불만은 나를 소진시키고 관계를 망가뜨린다. 하지만 나의 결핍을 직시하게 만드는 불만은 방향을 돌파력으로 바꾸는 출발점이 된다.
“나는 왜 늘 이 지점에서 멈출까?”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려 할 때, 비로소 불만은 성찰이 되고, 성찰은 행동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말속에는 어디선가 이런 문장이 숨겨져 있다.
“어른은 웬만해서 울지 않는다.”
그래서 힘들어도 참는다. 눈물이 날 것 같으면 농담을 하고, 가슴이 저려도 “괜찮아요”를 입버릇처럼 붙인다. 우는 순간, 내가 너무 약해 보일까 봐.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가 진짜 무너졌을 때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울지 못했을 때다. 울어야 할 순간에 울지 못해서, 삼켜야 할 말들까지 같이 삼켜 버려서, 도움 요청을 ‘민폐’로 착각해서, 결국 어느 날 한꺼번에 터져 버린다.
울음은 나약함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회복을 향한 제일 처음의 몸짓이기도 하다.
“나 힘들어.”라고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내가 어디서부터 무너지고 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나 혼자선 어렵다.”라고 말하는 순간, 비로소 누군가의 손을 잡을 자리가 생긴다.
울음을 죄책감으로 막아버리는 사회에서 우리는 강해지는 법이 아니라, 무너지는 법만 더 빠르게 배운다. 나약함을 인정하는 울음은 독립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진짜 독립을 준비하는 마음의 예열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자꾸 완생을 아주 거창한 것으로 상상한다.
회사를 떠들썩하게 뒤흔드는 성과를 내는 사람,
업계에서 “그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람,
인생의 방향을 완벽히 정리해 낸 사람.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은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조용하고, 느리고, 소소하게 변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10분 일찍 일어나 본다.
하기 싫던 일이지만, 최소한의 마감은 지킨다.
누군가를 원망하던 시간을 5분만 줄이고, 그 시간만큼 내 계획을 적어본다. 돌파력은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불만 속에서, 결핍을 인정한 사람이 “그래도 한 번 더 해보자”라고 작게 결심하는 순간마다 조금씩 생긴다.
독립도 마찬가지다. 울지 않는 사람이 독립하는 게 아니라, 울면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람이 조금씩 독립해 간다. 누군가의 인정을 못 받아도, 스스로의 수고만큼은 인정해 주는 연습. 다 이해받지 못해도, 최소한 스스로를 설명해 보려는 시도. 모두가 가는 방향이 아니라, 결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방향을 택하는 용기.
이 작은 선택들이 쌓여 미생과 완생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미생’이라는 말에는 애매함, 불완전함, 어중간함이 함께 묻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이 상태를 끝내고 싶어 한다.
“언젠가는 완생이 되고 말 거야.”
“언젠가는 다 갖추게 되겠지.”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평생 미생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늘 새로운 결핍이 생기고,
또 다른 불만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나약함과 마주하게 될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의미 없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완벽한 완생이 되지 못하더라도, 오늘의 미생이 어제의 미생보다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면, 조금 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이미 충분히 ‘진행형의 완생’ 아닐까.
결국 중요한 건 “완벽하게 완성되었느냐”가 아니라, “오늘도 조금은 나아갔느냐”다.
다시 처음의 문장을 가져와 본다.
불만과 울음은 결핍과 나약함의 결과다.
불만 속 결핍에서 돌파력을 만들고, 울음 속 나약함에서 독립을 꿈꾼다.
그렇게 미생은 완생으로 나아간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의 불만은 누구를 탓하는 데 쓰이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를 돌파하기 위한 질문이 되고 있는가. 지금 당신의 울음은 숨기고 싶은 약점인가, 아니면 독립을 준비하는 고백인가.
우리는 아직 미생이다. 그래도 괜찮다. 불만이 있다는 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울 수 있다는 건,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오늘도 조금 불만스러워도, 가끔 울컥해서 눈물이 나도 괜찮다. 그 감정들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완생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비록 느리고, 불완전하고, 자주 흔들리더라도. 그게 바로 우리 각자의 미생이 완생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