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라는 이름의 결과지

새옹지마

by JuPD

인생의 많은 선배들이 성공을 두고 “다 운이었지 뭐”라고 말할 때, 능력주의나 성과주의를 신봉하는 젊은 친구들은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운이 아니라, 본인이 잘해서 된 거잖아요?” 이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나이와 시기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로 ‘운’이라는 이름의 결과지를 받아보는 순간은 따로 있다. 어느 날 문득, 10년, 20년 전에 했던 어떤 선택들이 새옹지마처럼 계속 뒤집히고, 꼬이고, 풀리면서 지금의 자리를 만들어 온 과정을 아주 또렷하게 목도하게 될 때다. 그때 비로소, 내가 생각하던 ‘실력의 이야기’만으로는 설명이 잘 되지 않는 영역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검산을 시작한다. 그때 그 선택이 맞았는지, 다른 길을 골랐다면 어땠을지, 내가 컨트롤할 수 있었던 변수와 그렇지 못했던 변수는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따져본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를 다시 펼쳐보고, 논리와 인과를 총동원해 추론해 보지만 이상하게도 도무지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건가?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건가?” 이 질문 앞에서 이성과 논리는 점점 힘을 잃고, 어느 순간부터는 설명 불가능한 잔여분, 말 그대로 카오스만 남는다.


결국 남는 선택지는 하나다. 그냥 카오스를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


카오스는 단순한 무질서가 아니다. 우리가 아직 알 수 없고, 또는 감당할 만큼 이해하지 못한 어떤 질서의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결과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쓰이는 중이고, 지금 받아 든 것은 어디까지나 “중간 결과지”일뿐이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완전히 예측할 수 없을 수많은 복잡계의 인과관계 속에서 우리는 타인과, 사회와, 시대와 함께 그저 공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환경,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었던 안전망, 타고난 성격과 체력, 재능, 내가 만나온 사람들, 내가 지나온 시대까지 — 이 모든 것 위에 나의 능력과 성과가 얹혀 있다. 이 전체를 통틀어 우리는 흔히 “운이 좋았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능력이나 성과의 가치를 부정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분명히 노력해야 하고, 성장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고, 성취를 위해 땀을 흘려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오직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처럼 포장하는 태도는 굉장히 위험한 오만일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같은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단지 타이밍과 환경이 달랐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전혀 다른 결과를 얻었다면, 그건 정말로 전부 그 사람 탓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운을 인정한다는 건 나의 노력을 폄하하는 일이 아니라, 세상과 나 자신을 조금 더 겸허하게 이해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만으로 쌓았다고 착각하는 오만의 첨탑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가끔은 돌아봐야 한다. 그 첨탑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단 한 번의 병, 단 한 번의 사고, 단 한 번의 구조 변화, 단 한 번의 시대적 전환만으로도.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되, 결과 앞에서는 겸허하고, 타인의 실패와 성공 모두에 ‘운’이라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 그 위태로움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조금은 더 단단하고, 조금은 더 다정한 인간으로 다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