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다시 세워야 하는가
AI를 둘러싼 감정은 묘하게 종교적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종말의 짐승처럼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구원의 엔진처럼 기대한다.
그러나 이 두 감정은 사실 같은 뿌리를 가진다.
우리는 AI를 ‘밖에 있는 무엇’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한때 신을 하늘 위에 두었듯이.
지금 우리가 겪는 것은 단순한 기술적 불안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AI의 이중절망’이라 부르고 싶다.
첫 번째 절망은 대체의 공포다.
AI가 인간의 노동, 판단, 창작을 대신할 것이라는 불안.
우리는 오랫동안 “쓸모”로 존재를 증명해 왔다.
AI는 그 쓸모의 근거를 무너뜨린다.
두 번째 절망은 구원의 실패다.
AI는 효율을 높이지만 의미를 주지 않는다.
생산성은 증가하지만 삶의 방향은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술을 새로운 신처럼 기대했지만,
AI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
대체와 구원.
이 두 좌표 사이에서 인간은 중심을 잃는다.
17세기에도 비슷한 붕괴가 있었다.
인격적 신의 권위가 흔들리던 시대.
스피노자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신을 폐기하지도, 방어하지도 않았다.
대신 재정의했다.
신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신은 세계 그 자체다.
Deus sive Natura — 신, 즉 자연.
이 선언은 신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위치를 다시 배치했다.
인간은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한 양태(modus)로서
자기 존재를 지속하려는 힘,
즉 코나투스(conatus)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
신이 무너진 자리에
‘욕망의 주체’가 세워졌다.
지금 우리는 같은 오류를 반복한다.
AI를 초월자로 상정한다.
위협적 신이거나, 구원적 신이거나.
그러나 AI는 둘 다 아니다.
AI는 인간 밖에서 내려온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 선택, 기록, 자본, 권력 구조가 얽힌
거대한 복잡계 안에서 창발 한 새로운 층위다.
AI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
욕망을 갖지 않는다.
자기 보존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방향을 정하지 않는다.
단지 증폭한다.
AI가 무서운 이유는 지능 때문이 아니다.
속도 때문이다.
인간 욕망 → 데이터 → 모델 학습 → 예측과 생성 → 다시 인간 행동에 영향
이 순환이 실시간으로 가속된다.
작은 취향은 거대한 트렌드로 증폭되고,
작은 편향은 구조적 방향으로 굳어진다.
복잡계는 원래 비선형적이다.
작은 입력이 큰 결과를 만든다.
AI는 그 비선형성을 증폭한다.
문제는 AI가 통제 불가능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이 복잡계를 ‘외부의 존재’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신을 자연으로 재정립했듯,
우리는 AI를 재정립해야 한다.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다.
AI는 인간 복잡계 내부에서 발생한 필연적 산물이다.
AI는 초월자가 아니라
욕망이 기술을 통해 가속된 결과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뀐다.
“AI가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는가?”
근대 사회에서 인간은 중심 노드였다.
노동과 판단의 주체였기 때문이다.
AI 시대에는 중심이 이동한다.
인간 단독 주체에서
인간–AI 결합 복합체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AI를 통제하는 기술력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이다.
AI는 엔진이다.
코나투스는 인간이다.
시스템을 설계하는 아비투스가 그 둘을 연결한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복잡계는 자기 강화 루프 속에서 붕괴한다.
AI는 우리의 중심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능 중심의 존재였다는 사실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기능인가?
아니면 방향을 정하는 존재인가?
스피노자는 자유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유란 필연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AI 역시 이해의 대상이다.
숭배의 대상도,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우리가 재구성해야 할 것은 AI가 아니라
AI가 작동하는 욕망의 구조다.
신이 무너졌을 때 인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다.
AI가 흔드는 것은 인간의 기능이지
인간의 욕망이 아니다.
AI는 신이 아니다.
AI는 우리가 만든 복잡계의 새로운 양태다.
이제 묻자.
우리는 무엇을 증폭할 것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방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