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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ul 23. 2019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이렇게 살아도 돼>

올 초 한승태 작가가 쓴 <인간의 조건>이란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새우잡이 배에서부터 돼지농장, 주유소, 편의점 알바에 이르기까지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쓴 노동 에세이인데, 작가의 생생한 경험담과 탁월한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훌륭한 책이었다. 들어는 봤으나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알 방법이 없었던 일련의 세계에 대하여, 책을 통해 간접체험이나마 할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이란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알게 해 주거나, 또는 그간 막연하게 느끼거나 생각했던 것을 확인시켜주거나. <인간의 조건>은 전자에 해당했다.
 
박철현 작가의 <이렇게 살아도 돼> 역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역시 앞으로도 경험하기 어려울 세계를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전자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 동료를 따라서 재미로 시작한 경마 때문에 한 푼 두 푼 빚이 늘어나고, 이로 인해 사채까지 쓰게 된 저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으로 도피성 일본행을 감행한다. 그러나 일본어도 못하고 제대로 된 커리어도 갖추지 못한 젊은 청년이 바다만 건너왔다고 순식간에 인생이 역전될 리 없다. 그는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게임회사 직원부터, 백수, 가부키쵸 술집 삐끼, 전문적으로 파칭코만 하는 파치 슬롯 프로, 기자, 술집 주인, 인테리어 회사 사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을 거치게 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그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 그때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듣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특히나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뒷이야기를 내부자(?)의 생생한 경험담을 통해 듣는 것이 무척 재미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글로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흥미진진하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 버티는 것조차 어려웠을 경험들이다. 일단 사채빚까지 질 정도로 도박에 진탕 빠진 사람이 아예 손을 털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게 일확천금에 눈이 먼 생활을 하다가 다시 성실한 월급쟁이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도 어려울뿐더러, 능력이 있어도 의지가 부족한 사람이 태반이며, 삐끼나 파치슬롯 프로 같은 다소 어두운 뒷골목의 세계에서 무사히 버텨낸 것 또한 대단한 일이고, 그러다가 육체노동처럼 성실성을 요하는 양지로 다시 나온 것 또한 대단한 일이다. 그렇게 번번이 고비를 넘겼던 경험을 아무렇지 않게 묵묵히 서술하는데, 정말 놀랍다. 그렇게 살아야 했던,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아내를 비롯하여 네 명의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 정도 수준의 책임감이란 나에게는 거의 ‘재능’의 수준으로 느껴질 만큼 대단한 것이어서 읽으면서 참으로 감탄하고 또 감동했다. 특히나 지하철이 끊기고 택시비가 없어서 새벽에 집까지 몇 시간 동안 걸어왔던 에피소드는 눈물이 핑 돌 정도였고.
 
그러나 다소 아쉬운 부분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이자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이야기가 ‘어떤 자리에 있든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책임을 지는 것’이란 점이다. 물론 노력과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중요하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기를, 행운의 여신이 손을 흔들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어쨌든 자신이 행한 일에는 대가를 치러야 하고, 매 순간순간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 또한 맞는 말이다. 다만, 이것은 많은 자기 계발서에 해당되는 비판이기도 한데, 그런 자세와 성실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구조적 모순이 우리 사회 도처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구조적 모순이 있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사회 탓만 해서는 안될 것이며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일을 성실하게 사는 것 외에는 없지만, 그러한 자세만으로 인생이 풀리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생은 개인의 자세뿐 아니라 수많은 운과 다양한 변수가 더해져 돌아간다.
 
말하자면 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살아도(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하고 각종 직업을 전전하게 되더라도 다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살면)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사실 저자의 경우만 하더라도 자신을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여성을 만나고 그녀와 결혼의 연까지 맺을 수 있었던 것, 센이치(천분의 일 확률)에 해당하는 사채업자를 만나 여러모로 배려를 받을 수 있었던 것, 이해심과 배려심이 높은 합리적인 상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 삐끼와 같은 암흑세계의 일을 하면서 변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등등해서 엄청난 행운을 입었기에 오늘날까지 무사히 살아있다(!!) 고도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때 온갖 직업에 금세 적응하고 거기서 만난 수많은 사람과 그토록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타고난 지능과 카리스마 덕분이었을 텐데, 그것 역시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저자가 책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행운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역시나 ‘노오력’으로 수렴하는 것은 다소 아쉬운 지점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삐끼 시절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물론 직업에 있어서 귀천이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암흑세계에 대해서까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로 퉁치기에는 어떤 찜찜함이 남는다. 물론 삐끼 업무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가 했던 일 역시 자신이 맡은 바를 성실히 최선을 다한 것에 불과하지만, 다시 이 호객행위를 관리하는 조직 차원으로 들어가면 역시나 더욱 거대한 어둠의 세계가 등장하는 것이다. 각자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무엇을 배경으로 하여,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그 안에서 희생되거나 묻히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은지 등등을 생각하는 것은 항상 중요한 문제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하여간 그렇게 다소 아쉬운 지점은 있었으나 이것은 책의 완성도나 글의 재미보다는 인생을 대하는 철학의 견해 차이일 것이고, 기본적으로는 무척 재미있는 책이었다. 사는 게 힘들 때마다 홈쇼핑에 나와서 자기 가방 홍보하는 패리스 힐튼 생각하면서 “패리스 힐튼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라고 생각하기로 결심했는데, 또 하나 마음의 위안을 삼을 이야기가 생겼다. 사채빚도 있고 아무것도 없었던 청년도 열심히 살아서 이렇게 멋진 사장님이 되었는데!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가부키초 뒷골목 이야기가 더 상세히 적혔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후에 다른 책에서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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