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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Aug 19. 2019

올해 최악의 책

<더 걸 비포>

JP 덜레이니의 <더 걸 비포>, 올해 읽은 최악의 책이다. 휴가 때 들고 간 게 이것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더 스크랩>이었는데, 둘 다 가볍게 읽기 좋을 듯해 골랐지만 완전 대실패. 하지만 들고 간 게 저 두 권뿐이었던 덕분에 어쨌든 끝까지 읽긴 읽었다는 것.
 
<더 걸 비포>의 경우 제목과 표지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전형적인 칙스릴러이다.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칙스릴러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장르의 일종으로, 할리퀸에 살인이나 사이코패스 등의 위험 요소를 끼얹은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매우 뻔하지만 그 뻔한 느낌이 의외로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적당히 자극적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문방구에서 쫀드기 같은 불량식품 사 먹는 기분으로 가끔씩 본다. <걸 온 더 트레인>처럼 아주 훌륭한 오락소설들이 간간이 있다.
 
장르소설들이 다 그렇지만 한 번 이런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들은 계속 비슷한 작품을 쓴다. 더글러스 케네디가 쓰는 소설들도 크게 보면 이런 장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작가의 성별에 따라 소설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남성 작가:
순수하고 착한 소시민적인, 아마도 작가 본인을 투영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남자가 주인공. 그림, 글, 사진 등 소소한 취미이자 남몰래 갖는 꿈이 있음. 큰 거 안 바라고 행복하게 사는 게 목표인데 남자의 아내는 그런 주인공을 야망이 없고 찌질하다는 이유로 바가지를 긁어대며 비웃고 무시함. 남자는 아내에게 맞서 대항할 용기가 없어서 암실에서 사진 현상하거나 서재에 숨어서 책 읽음. 그런 와중에 열이면 열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남자가 집에서 쫓겨남. 게다가 억울하게 살인사건 등에까지 휘말림. 주인공은 “빼어난 미남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미소를 지녔다”, “배가 약간 나오긴 했지만 아직 몸이 탄탄했다”, 등으로 종종 묘사되곤 함. 대머리는 단 한 명도 없음.
 
여성 작가:
순진하고 착한 평범한 여자가 주인공. 우연히 만난 미남과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부자!! 로또 맞은 줄 알고 내 인생에 이런 행운이! 하고 감격하며 주변 여자들의 질투와 시기에 우쭐하는데 좀 더 지나고 보니 그놈이 사이코패스!!!! 사람들 앞에서는 세상 좋은 척 선량한 척 행동하는데 알고 보면 미친 사이코. 한결같이 엄청 잘생겼다는 특징이 있음. 금발에 파란 눈이며 모든 여자가 보기만 하면 기절해 버릴 정도의 눈부신 미소를 지님. 머리도 평판도 뛰어난 그 남자를 주인공 여자가 어떻게 해치우느냐가 관건임.
 
<더 걸 비포>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칙스릴러의 규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허영심이 심한 제인은 돈이 없지만 넓고 세련된 최신식 집에서 살고 싶은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동산 중개인이 엄청 특이한 집이 있기는 있다면서 매우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한 유명한 건축가가 세웠다는 특이한 저택은 집주인에게 이력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면접까지 합격해야 입주가 가능하다. 집세가 저렴한 대신 지켜야 하는 규칙이 엄청나게 많다. 집안에 미리 비치된 가구 이외에 별도의 인테리어를 할 수 없고, 책장을 둘 수 없으며, 매주 1회 하우스 키퍼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 외에도 규칙이 뭐 몇 백가지 있고. 게다가 적절한 체중과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있다.


아무리 싼 월세로 좋은 집에 살 수 있더라도 이런 정신 나간 조건을 지키면서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우리의 주인공들은 정신이 나갔기 때문에 기꺼이 그런 집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집주인과 면접을 보고, 당연한 수순이지만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그에게 반한다!!!!
 
아니 뭐 백번 양보해서 집주인이 잘생긴 남자라는 것, 여주인공이 그에게 반한다는 설정까지도 이해할만하다. 문제는 여주인공이 그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우리가 왠지 같이 자게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야!!!!!!!!!
 
여기서부터 슬슬 수상한 조짐이 보이지만 아직 이 정도를 보고 놀라긴 이르다. 집주인은 어느 날 갑자기 대뜸 집에 전화하더니 밑도 끝도 없이 찾아오겠다고 한다. “지금 당장 당신을 갖고 싶어요. 우리 같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대사를 날리면서. 현실이었으면 뭐 이런 미친놈이? 하고 경찰 신고 각이지만 여주인공의 경우 앞서 말했듯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집주인을 기다리고 둘은 격렬한 섹스를 한 뒤 어김없이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이 집주인이란 놈이 알아볼수록 보통 사이코가 아니다. 통제광에 소시오패스이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규칙에 어긋나면 참지 못한다. 심지어 폭력도 쓴다. 주인공은 그가 점점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 집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알고 봤더니 이 집에 자기보다 더 전에 살았던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얼굴마저 자신과 몹시 닮아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오래전 죽었다는 집주인의 와이프 역시 자기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런 우연이!!!!!
 
알고 봤더니 전 세입자였던 엠마는 남자 친구인 사이먼과 이 집에 같이 입주했었다. 그러다가 집주인과 사귀게 되면서 사이먼과는 헤어졌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져 자살했다고 한다. 사이먼은 제인에게 접근하여 아무래도 집주인이 엠마를 살해한 것 같다고 호소한다. 제인의 의심은 점점 커지고 집주인과의 관계는 위태로워진다. 집주인과의 관계가 위태로워질수록 집의 시스템도 점차 이상해진다. 자꾸 집안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결국 불안한 제인은 어느 날 저녁 사이먼을 초대해 집에 같이 있어달라고 했다가 실은 사이먼이야말로 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이먼은 엠마에게 차인 뒤 그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집안의 시스템을 해킹하고 결국은 살인까지 했던 것이다. 그 뒤는 엠마를 닮은 제인에게 또다시 집착하는 중이고. 제인은 모든 정황을 파악한 뒤 사이먼을 해치운다.
 
정말 스토리가 허접하기 그지없는 것은 둘째 치고, 인물들이 하나같이 맛이 간 사람들이라 읽어주기가 힘들었다. 사실 스릴러에서 사이코패스가 나오는 것이야 당연하다. 문제는 아무리 사이코라도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무슨....
 
“아마 더러운 접시 같은 것들이었겠지. 나는 그것들을 곧장 치우는 대신,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며 그를 침대로 이끌려했다. 그러자...... 퍽. 그는 분노했다. 그리고 나는 최고의 섹스를 했다. 나는 그의 팔과 가슴 사이의 온기가 깃든 곳으로 기어들어가 좀 전에 그에게 소리쳤던 말을 반복한다. 좋아요, 대디. 좋아요.” (269쪽)
 
아니 아무리 통제광에 사이코패스라도 폭력까지 쓰다니요? 고작 설거지 안 했다고? 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전화해서 “오늘 밤 당신과 잘 거야”라고 다짜고짜 선언하는 미친 자신감과 맨날 똑같이 생긴 여자한테 집착하는 그로테스크함은 또 어떻고? 더욱 황당한 것은 여성 인물들이다. 때리는데 그날 최고의 섹스를 했다니요???? 좋아요 대디????
 
여성 인물들이 애인에게 맞고 오히려 섹스하면서 흥분을 했다는 설정을 비롯하여 남성에 대한 집착으로 성폭행을 안 당했는데 거짓 신고를 하는 식의 대목에서는 그야말로 작가가 돌아버린 거 아닌가 싶었는데, 나중에 이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납득했다.
 
흥미를 위해 어느 정도 자극이나 무리수적인 설정을 넣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장르소설들이 대개 그런 식이고. 그러나 칙스릴러에도 등급이 있는 법이다. 이런 소설에 비하면 <걸 온 더 트레인> 같은 책들은 아주 고전 명작 급이라는. 알라딘 MD 추천인가 어디서 보고 주문해서 읽게 되었는데, 그 리스트 만든 MD를 신고하고 싶을 정도의 끔찍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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