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Aug 23. 2019

서평을 읽는 이유

<정희진처럼 읽기>

일전에 ‘넷드링킹 사건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 검색, 특히 조선일보에 상세한 기사가 나옵니다)’이 화제가 되었을 때, 홍보용으로 작성된 가짜 서평을 두고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남이 쓴 서평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면서, 책을 살 때 ‘서평집’은 절대 고르지 않는다는 글도 있었다. 서평을 자주 올리는 사람으로서 다소 서운한 이야기이긴 하나 한편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나 역시 과거에는 남이 쓴 서평을 절대 읽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평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비롯해서 ‘평론’이라는 장르 전반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평론을 읽거나 보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어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을 읽어봤자 아무것도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이미 경험한 이후라면 굳이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아도 별반 재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 자체가 나쁘다거나 가치가 없다기보다는 남의 평가를 읽을 시간에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것이 낫겠단 생각이었다고 할까.
 
그런 와중에 평론을 읽는 재미를 깨우치게 된 것은 의외로 작법서를 읽으면서였다. 작법서 중에서도 특히 소설가들이 쓴 책은, 자신이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를 주로 다루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특정한 책에 대한 언급이 들어간다. 그 책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어떤 대목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왜 자신에게 있어서 중요한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책 전체가 의도치 않게 서평 비스무레한 것이 되는 것이고. 남이 어떤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등등 별로 흥미롭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굉장히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이렇게나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웠다.
 
그러니까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세상이 얼마나 흥미로운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서평을 읽는 것은 사람들의 관점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배우는 것에 가까웠다. 책의 내용에 동의하면 동의하는 대로, 동의하지 않으면 동의하지 않는 대로 그 사고가 전개되는 방식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마치 책과 독자가 토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글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서평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좋은 ‘글’ 을 가려내는 시각을 길러주기도 한다. 물론 재미있는 책, 몰랐던 책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은 기본이고. 그 뒤부터는 서평이나 평론 등도 자주 읽고 있다.
 
<정희진처럼 읽기>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학자 정희진의 서평집이다. 한겨레에 연재했던 79편의 독서 칼럼을 모았다. 한때는 정희진 선생님의 글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좋은 글도 많았지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올 초 <혼자서 본 영화>라는 그녀의 영화평 에세이집을 읽고서 그간 그렇게 느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주 다르다. 날카롭다거나, 명료하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냥 아예 차원이 다른 경우가 많다. 그런 한편으로는 그렇게 남들과는 다른 생소한 생각의 결을 구구절절 세세하게 풀어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체 뭔 소리야?’ 하는 말을 내뱉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친절한 글쓰기 방식(이를테면 황현산 선생님의 글처럼)과는 거리가 있고, 호불호가 많이 갈리게 되는 스타일이다. 글쓰기의 방식 자체가 우선 그렇다. 의견이나 관점 역시 보통 사람들과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므로 여러모로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란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는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진부하지 않은, 뻔하지 않은, 기존의 체계와 관습과 사고를 뛰어넘는 또 다른 눈. 오직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귀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갠지스강 칼럼은 나도 굉장히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그로 인해 그의 다른 좋은 글들마저 도매급으로 매도되는 것은 안타깝다.)
 
책에 실린 79편의 서평, 그 안에 실려있는 모든 관점이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책을 읽는 방법과,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배웠다고 체득되는 것은 아니므로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또 오랜 시간을 들여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의 강점, 유익할 뿐만 아니라 엄청 웃기기도 한다는 것.
 
“아직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을 만난다. 이 헌신적인 사도들에 대한 내 감상은 세 가지다. ‘아, 저 열정이 부럽다.’, ‘천당이 그렇게 좋으면 먼저 가시지.’, ‘여기가 지옥인데 뭘 벌써부터 걱정을....’ 삶이 지옥이라 사후 지옥이 안 무서운 사람이 나뿐일까.
(...)
공포는 반응이지 현실이 아니다. 공포는 겁먹은 자에게만 효과가 있다. -p.108-110, 공포는 존재하였기 ‘ 때문에’ 지금 존재한다
 
“여성 상위?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것이 아니라 역할(노동량)이 많아진 것이다. 100퍼센트 주부로만 사는 전업주부도 없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이들도 재테크부터 인형에 단추 달기까지 부업을 하거나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남성의 가사 노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여성의 취업은 평등이 아니라 이중 노동이다.
(...)
사족. 이런 글을 쓰면 꼭 “나는 안 그렇다.”라는, 인정 욕구인지 자랑인지 항의인지 모를 남성의 편지를 받는다. 나는 이렇게 답장을 한다. “반갑습니다. 다른 남성들도 선생님처럼 변화시켜주세요.” -p.142-143, 2교대

매거진의 이전글 이렇게 재밌는 남의 애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