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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Aug 26. 2019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여인>

어린 시절 보고 들었던 여성들의 연애담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
 
별로 관심이 없는 남자가 자꾸만 쫓아다닌다. 처음에는 너무 귀찮고 싫었는데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된다. 사귀기 시작하고 초반부에 남자는 간이고 쓸개고 빼줄 듯이 잘해주고 애지중지 해준다. 그런 과정에서 나 역시 조금씩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자가 조금씩 시들해지는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젠 내가 남자를 더 좋아하게 된 상태다. 처음과 달리 관계는 역전되었고, 나는 불안한 약자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한 번 돌아선 남자의 마음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남자는 떠나버린다.
 
대학교 익명 게시판이나 여초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 과장 안 하고 오조오억 번 보았다. 에이, 인터넷 글이 다 그렇지 뭐, 싶겠지만 실제 주변에서 목격한 사례도 꽤 많았다. 친구들 중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억지로 사귀었는데 나중에 본인이 더 좋아하게 되어 전전긍긍하고 마음고생하다가 안 좋게 끝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2000년대에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온갖 연애 지침서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부터 시작해서 <현명하게 사랑하라> 같은 책들. 너는 대체 뭔데 그런 걸 다 알고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인터넷 죽순이였기 때문입니다(눈물). 한때 익명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글을 읽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연애 문제로 괴롭다는 글에 저 책들을 추천하는 댓글이 자주 달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섹스 앤 더 시티라는 드라마는 이런 고민을 하는 여성들을 위한 교과서와도 같은 존재였고.
 
당시에 그런 글을 보며 내가 했던 생각은 이렇다. 왜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사귀는가에 대한 의문.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연애 과정에서 마음이 떠난 애인에 대하여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연애를 하는 것은 더 행복하고 즐겁기 위해서인데 애초에 ‘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사귀는 것인가. 왜 굳이 즐겁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귀고, 억지로 만나고, 불균형한 감정을 주고받다가, 관계가 역전된 뒤 거기에 질질 끌려가는지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이런 현상의 원인을 이해할 것도 같다.
 
일단 사회적으로 ‘여자친구’, ‘남자친구’, 그리고 ‘연애’라는 것에 대한 인식과 역할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는 연애를 하지 않으면 마치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금보다도 더’ 강했다. 지금은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굳이 연애를 할 필요 있나?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점점 조성되는 상황이고, 연애인과 비연애인 사이의 우열관계 또한 점차 없어지는 추세이지만, 과거에는 분명 그런 것이 있었다.
 
애인이 없다고 하면 뭔가 가엾게 바라보고, 어딘가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덜 떨어진 사람이 된 것 같은 분위기.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성들 또한 전혀 좋아하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억지로’ 사귀게 되는 경우가 분명 없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귀게 된 뒤에는 ‘여성은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회적 믿음에 따라 관계에 충실하려 노력하고, 그러다 보니 남성보다 관계 자체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그 관계를 지키려 애쓰게 되고, 반면에 남성은 점차 거기에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고, 그러면서 점점 더 불안 초조해지고 했던 것이 아닐는지?
 
진화심리학적으로 여자는 어쩌고 남자는 어쩌고 웅앵웅앵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생각하지만, 분명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남성에게 기대하는 성역할이 존재했고, 동의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잠재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기는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또는 ‘잡은 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와 같은 속담만 하더라도 그렇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이야기는 남성들에게는 헛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여성들에게는 마치 마지막에 가서는 넘어가 줘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불러일으킨다. 원래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다 시작되는 것 아닌가 하는 체념을 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잡은 고기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속담 역시 여성에게는 관계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남성에게는 일단 고기는 잡기만 하면 된다는 쓸데없는 근자감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속담은 공통적으로 여성을 사냥감, 혹은 쫓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체계를 공고히 한다.
 
잘 살펴보면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영화 속 사랑 이야기 대부분이 저것과 유사한 구조를 띤다. 남자는 쫓고, 여자는 잡히고, 그러다가 남자는 떠나고. 물론 여성이 불안해하는 사이 다시 남성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혹은 또 다른 남성을 등장시킴으로써 70~80년대에 유행하던 드라마처럼 남성과 여성이 불타는 하룻밤을 보내고, 여성이 ‘순결’을 상실하고, 혹은 임신까지 하고, 남성이 떠나고, 여성은 그런 남성을 지고지순하게 기다리는 차원보다는 다소 진화한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많은 드라마에서 쿨하고 싶었으나 쿨하지 못한 여성을 그려냈었고, 그런 모든 것들은 전형성을 강화하는 기재로 작용했던 것이다.
 
물론 문화가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고, 사회가 문화를 따라가기도 하므로, 뭐가 더 옳다 그르다 하는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그런 모든 작품이 ‘빻았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시절에는 분명 남성과 여성의 연애담을 둘러싼 어떤 전형성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성들의 연애담이 죄다 유사했던 것 또한 알게 모르게 저런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일 테고. 실제로 여성들의 행동이나 인식 체계 또한 그러한 전형성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고.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비틀거리는 여인> 또한 근본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여성의 흔한 연애담과 동일한 구조를 따라간다.
 
정숙하고 우아한 유부녀인 세쓰코는 남편을 만나기 전 이렇다 할 연애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젊은 시절 첫사랑과 가볍게 입맞춤을 했던 경험이 있기는 하나, 그것뿐, 제대로 된 정열을 불태웠다고 할만한 기억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세쓰코는 입맞춤을 했던 첫사랑의 대상인 쓰치야가 자꾸만 자기 주변을 맴도는 것을 느끼고 그와 ‘순결한 연애’를 해 보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순전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차원, 말하자면 그냥 재미로, 또는 역할놀이하듯이 가볍게 시작된 관계였다. 육체적 관계는 갖지 않는 친구처럼 순수한 만남만을 갖기로 결심했으나, 그런 결심이 무색하게 세쓰코는 점차 쓰치야에게 빠져든다. 당연히 육체관계도 맺게 된다. 심지어 나중 가서는 쓰치야보다 세쓰코 쪽이 훨씬 더 좋아하게 된다. 세쓰코는 그런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져서 몇 번이고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결심은 번번이 무너지고,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쓰치야에 의해서야 그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억지로 끝내게 된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상대를 점차 좋아하게 되는 과정, 그러다가 관계가 불균형해지는 것, 그로 인한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쉽게 이별을 고하지 못하는 부분, 부당한 대우에 분노하려다가도 상대의 아주 사소한 행동에 헛된 희망을 품으며 정신승리하는 듯한 모습이 굉장히 리얼하고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던 다소 전형적이었던 여성들의 연애담 속 인물들의 심리를 굉장히 상세하게 알게 된다.
 
읽다 보면 세쓰코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과 동시에 고구마 백 개 먹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면서, 하아... 쓰치야.... 이 짜증 나는 XX... 이딴 XX랑 빨리 헤어져.... 뭐 이런 말이 나오게 되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과거 익명 게시판 열심히 하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을 가정해본다면, 남친의 마음이 식은 것 같아서 고민이라는 여성에게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보다 이 <비틀거리는 여인> 쪽이 훨씬 더 유용한 조언서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다자이 오사무나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로 그들만이 온전히 여성의 입장이 될 수 있었던 남성 작가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미시마 유키오가 그 둘 보다 더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들었으면 사뭇 반발할 이야기로서, 아마도 그러한 내면의 여성성을 없애고 싶었는지 아침마다 기계체조도 열심히 하고 냉수마찰하고 헬스 해서 몸짱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역시 이런 작품들을 읽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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