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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Sep 17. 2019

더 넓어진 세계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언제였는지는 가물가물한데 아마 대학생 때였지 싶다. 실연 당해 질질 짜고 있던 나를 향해 아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자들은 왜 그렇게 사랑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고. 사랑 따위 별거 아니라고.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데 여자들은 사랑을 너무 큰 것으로 생각한다고. 실연당해 우는 딸을 위로하겠다는 마음에서 한 이야기치고는 표현이 지나치게 직설적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때까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주변의 많은 여자친구들이 사랑에 굉장한 중점을 두고 있었다. 대화의 화제는 주로 애인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수렴하기 일쑤였으며,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성애적) 사랑이었다. 행복의 절대 조건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남성들 역시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훨씬 더 강한 집착을 보이고는 했지만, 여성들과는 바라보는 관점이랄까, 삶의 철학 자체가 꽤나 차이가 났다. 그러니까 남성들에게 있어 연애는 삶에서 20% 정도의 비중에 불과한 반면에, 여성들에게는 70% 이상 차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왜 여자들과 남자들이 사랑을 대하는 태도나 철학이 차이가 날까? 아빠의 말을 들으면 마치 여자들에게 타고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럴까? 정말로 유전자의 차원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사랑에 더 집착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적으로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거쳐 정착에 적합하게 설계되어 있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죄다 헛소리라 생각한다.
 
성별이 다른 두 아이를 키우면서 깨닫게 된 점이 있다. 여성과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를 살펴보면 대부분 모험, 대결,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수렴한다. 헬로카봇의 주인공 차탄은 가족들과 주변인들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영웅처럼 기지를 발휘해 온갖 일을 해결한다. 차를 타고 하늘을 날며 악당을 물리치고 시공간을 이동한다. 팽이로 대결하는 베이블레이드의 주인공들은 오로지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반면에 여자아이들이 가장 많이 보는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콩순이, 콩순이의 세계는 좋은 말로 하면 아기자기하고 나쁜 말로 하면 협소하다. 콩순이는 엄마가 외출한 동안 동생을 돌보아주고 동생과 엄마의 화장품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하며 놀이터에서 친구를 만나 새 옷을 입은 장면을 보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철없고 서툰 아빠를 놀리며 웃기도 한다.
 
한 때 아이를 키우는 모든 가정의 구원자라고 여겨졌던 뽀로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뽀로로에서도 남자 캐릭터로 비치는 뽀로로와 크롱은 늘 모험을 하거나 말썽을 부린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여자 캐릭터인 루피는 케이크와 빵을 굽고 주변 친구들을 돌보고 때로는 잔소리하는 엄마처럼 야단을 친다. 패티라는 새로운 친구가 왔을 때는 질투하는 모습도 보인다.
 
나를 포함하여 내 또래의 여성들은 대개 어린 시절 공주 이야기를 보며 성장했다. 사악한 계모의 괴롭힘에 시달리면서도 어느 날 반드시 나만의 왕자님이 나타날 것이라 노래를 부르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 공주를 보면서, 괴물에게 끌려간 공주를 언젠가 반드시 왕자가 나타나 구원한 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 수많은 이야기를 보면서 성장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우리의 무의식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생각해본다. 사랑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믿게끔 하는데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인이 된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성들이 <대부> 같은 영화를 보며 마피아 수장의 카리스마에 감탄하고, 순진한 청년이 냉혹한 마피아로 탈바꿈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에 전율을 느끼고, 그러면서 적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삶과 죽음에 고뇌하는 사이, 여성들은 <귀여운 여인>을 보면서 나한테도 저런 ‘왕자님’이 등장하기를 꿈꾸었던 것 같다.
 
누가 남성들은 <대부> 보고 여성들은 <귀여운 여인> 보라고 정해둔 적 있나? 각자 취향에 맞추어 자기가 좋아하는 것 보았을 뿐인데, 사용자들이 그런 컨텐츠를 원하니 만들었을 뿐인데 어쩔 것이야! 하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과연 그 컨텐츠에 암묵적인 사회의 압력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두 가지 영화를 보면서 시청자가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캐릭터의 성별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에 와서 나는 그런 점이 궁금해진다.
 
김진아의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는 이와 같이 각종 컨텐츠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주입된 성역할을 극복하려 애쓰고, 그런 과정에서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 안에도 여성 혐오가 있음을 인지하고 극복하는 과정에 대한 에세이다.
 
‘울프소셜클럽’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저자는 본래 잘 나가던 고액 연봉의 카피라이터로 직업적으로도 잘 나가면서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고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화려한 연애를 하는 문자 그대로의 ‘골드미스’였다. 그러나 그랬던 그녀 역시 위로 올라갈수록 여성이라는 성별로 넘어설 수 없는 단단한 벽과 성별에 따른 엄청난 격차를 인지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그녀는 한때 ‘바이블’처럼 숭배했던 섹스 앤 더 시티가 사실상 여성들에게 얼마나 해로운 컨텐츠였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는 얼핏 여성들 역시 섹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전문직으로 잘 나갈 수 있으며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을 위해 거침없이 투자하는 듯 그려두었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남성에게 목메고 잠시도 남성 없이 생활하지 못하는 컨텐츠에 다름 아니라고. 시청자들은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그들을 동경하는 동시에 그들의 캐릭터를 내면화하며 실상 각자의 야망과 재능이 무엇이건 간에 연애와 결혼이 여성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슈라 여기게 된다고.
 
한 때의 열렬한 애청자로서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여성들 간의 연대, 탈코르셋 등 페미니즘 관련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데 굉장히 힘 있고도 명쾌한 시각이 인상적이었고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한편으로 평소 나의 생각보다는 조금 더 급진적인 측면도 있어 모든 면을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예를 들어 외모 권력은 여성에게만 적용되고 남성에게는 예외라는 주장이라든가 (남성에게 더욱 관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이라고 모두가 자유롭지는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는 부분들. 전반적으로 ‘고학력’, ‘고연봉’ 출신의 엘리트 여성이 하는 이야기이다 보니, 주제가 페미니즘이라 하더라도 담론 자체가 중산층 엘리트 여성을 위한 것으로 치우쳐 있는 것도 다소 아쉬웠고, 그러나 이는 책의 볼륨이나 저자의 배경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따로 있으므로 부족한 부분은 또 다른 목소리를 통해 들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본 기사에서, 최근의 여성들은 명품 가방과 꾸밈비용에 지출을 대폭 줄이고 자동차와 부동산 같은 실질적 재산에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고 나오던데, 이 책을 읽었던 것이 떠오르며 여러모로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환상과 남성에게 욕망당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여성들이 이후 어디로 도달할지 많이 기대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들과의 관계는 늘 삐걱거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욕심을 부릴수록 ‘남자에게 욕망당하고 싶은 욕망’과 ‘남자에게 이기고 싶은 욕망’이 제각각 증식하며 충돌했기 때문이다. 두 가진 모순된 욕망 사이에서 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분열했다. 만남을 잘 이어가다가도 반복적으로 폭발하곤 했다. 내가 아닌 모습, 강남 도련님들 좋아할 만한 참하면서 동시에 섹시한 여자를 연기해야 한다는 자괴감, 남자는 실력으로 경쟁하고 이겨야 할 상대인데 그런 대상에게 초이스받아야 한다는 굴욕감, 결국 결정권이 나에게 없다는 데서 오는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당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한 수치심까지. 사실상 남자와의 관계보다 스스로의 내적 갈등과 폭주에 쏟은 에너지가 훨씬 컸다.
여자들은 권력에 대한 감각이 없고 권력욕도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나의 욕심은 분명 권력욕에 가까운 것이었다. (...)

클럽이나 거리에서 쫓아온 남자가 내 번호를 묻는 것? 회식할 때 힘 있는 남자 상사들이 내 옆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것? 그 순간 바짝 자존감이 채워지고 우쭐한 기분이 들 수 있지만 그걸로 끝이다. 실질적 이득은 없다. 이렇게 채워지는 자존감은 나이를 먹을수록 상실감으로 대체된다. (...)

‘남자에게 욕망당하기’는 권력이 아니다. 여자들에게 주어진 미션, 여자들끼리의 외모 경쟁이자 남자에게 권력을 넘기는 행위다. 왜 돈은 돈대로 들고 유통기한도 짧은 레이스에 뛰어들어야 하나? 남자에게 욕망당해야 여자로서 존재 가치가 높아진다는 건 거대한 사기다. 예쁘다고 월급을 더 받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할리우드 여자 배우들조차 남자 배우들에게 훨씬 못 미치는 출연료를 받는다.
‘백마 탄 왕자’처럼 실재하지 않는 가짜 권력에 속지 말자. ‘예쁘다’는 찬사는 ‘추한 여성’이라는 낙인보다 더욱 강력하고 교묘한 현실 통제 수단이다. 그 안에 매몰돼 더 이상의 꿈을 꾸지 못하도록 막는다. 모든 여자는 아름답다? 아니, 여자는 예쁠 필요도 욕망당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초이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해방되는 순간 진짜 힘이 생긴다. 타인이 아닌 나에게 힘을 돌려주자. -p.-87-90, 초이스에서 해방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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