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여름은 참으로 이상한 계절이다.
십여 년도 더 전에 친구들과 경포대에 놀러 갔던 적이 있다. 당시 신입사원이었던지라 여름휴가를 길게 뺄 수 없어 대신 주말에 짧게 국내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었다. 밤기차 타고 정동진 들러서 아침 해 뜨는 거 보고, 그다음 날 속초에서 1박 하고 돌아오는 일정.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낮에는 뭐 하면서 보냈는지 잘 생각 안 나고, 아무튼 밤에는 다음날이면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워서 잠깐 밤바다 산책이나 하자 하고 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난 밤의 바다에 그렇게나 사람이 많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해변을 꼬박 메울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여름에 바다에 사람 많은 게 뭐가 그리 대수냐 싶을 수도 있겠으나, 나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은 단순히 사람이 많다는 지점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눈빛 때문이었다. 돗자리를 펴고 앉거나 모래사장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이들의 눈빛은 낮과는 사뭇 다르게, 그야말로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지나다니는, 혹은 앉아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살피며 그 자리에서 같이 놀 이성을 물색하고 있는 것이었을 텐데, 남자건 여자건 가릴 것 없이, 어디 수풀에 숨어 무슨 먹잇감이라도 노리는 듯한 야생 동물의 눈을 하고 있었다. 너무 낯설고 무서우면서도 기묘했던 그 눈빛들이 왠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러한 눈빛들은 오로지 ‘여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휴가지와 밤바다의 조합이 주는 어떤 짜릿한 흥분이나 일탈의 감각 또한 분명히 있었겠으나, 계절이 여름이 아닌 겨울이었다면 그와 같이 이글이글하는 눈빛은 결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여름은 많은 생물의 발정기이자 짝짓기 시기이기도 하다. 인간이라고 다를 바가 무엇인가. 현대사회의 인간에게는 특정한 발정기가 없으나 원시시대에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어쩌면 여름에 사람의 피는 다른 계절과 조금 다르게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더위와 습도와 일조량을 비롯한 기타 자연조건 하에서 아드레날린과 세로토닌의 분비가 평상시와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여름’을 테마로 한 영화들만 보더라도 참을 수 없는 충동, 타오르는 열정, 불타는 사랑, 그러한 모든 열정이 끝난 뒤의 허무함 같은 것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여름은 참으로 이상한 계절이다. 사람에게 야릇한 느낌을 자주 부여한다. 미쳐버릴 것 같은, 터져버릴 것 같은,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그런 여름에 참으로 읽기 적합한 작가이다. 제어할 수 없는 충동, 짜릿한 쾌감, 야릇한 감정, 더위가 주는 짜증과 더불어 저도 모르게 나른해지는 그 기묘한 감각을 이렇게나 잘 그려내는 이가 또 있을까. 더군다나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얼마 전 출간된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더욱 그러하다.
요즘은 소설도 카드 뉴스로 읽는 시대라 줄거리 요약이 없으면 사람들이 관심을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이들을 위해 짧게 요약하자면,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휴가지에서 한 기혼여성이 바람날 뻔하다가 마는’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인터넷 서점에 뜨는 이 책의 부제에는 ‘뒤라스 판 부부의 세계’라는 것이 붙어 있기도 하다.
주인공 사라 부부와 친구 부부,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싱글 다이아나는 모두 함께 한 바닷가 마을로 휴가를 떠난다. 사라는 덥고 무료한 그 휴가지가 짜증스럽기만 하다. 더군다나 남편과 다이아나 사이에는 사라가 끼어들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유대까지 있는 듯 보인다. 실제로 남편은 과거에 다이아나와 ‘실수’로 어떤 일을 한 적이 있다는 고백까지 한 적 있을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모든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들 잘 지낸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하여간 그토록 무료하고 지겨운 휴가의 와중에 보트를 가진 한 남성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그는 사라에게 조금씩 관심을 보이고, 사라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둘 사이의 기류를 눈치챈 사라의 남편은 점차 초조해하며 사라에게 다른 지역으로 여행 갈 것을 권하나 사라는 거절하고, 그러자 남편은 태도를 바꾸어 본격적으로 두 사람을 이어주려는 듯 행동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라는 비로소 마음을 바꾸게 되는데....
더 이상은 스포일러가 될 듯하여 이만 줄이지만, 정말 많은 키워드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하며 읽었던 작품이었다. 줄거리만 보면 무슨 막장 소설 같지만 소설에는 단순히 ‘불륜’ 이상의 보다 진지하고 심오한 주제의식이 담겨 있다. 인간은 어째서 속박을 원하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는지, 왜 그토록 모순적인 존재인지, 사랑은 정녕 필연적으로 권태로울 수밖에 없는지, 등에 대한. 부부 관계, 인간관계, 우정, 권태, 충동, 쾌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는 사랑.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지막에 사라가 내리는 결정이었고. 인간의 쾌락이나 감정이나 어떤 관계의 유효기간이 대개는 다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디테일은 조금씩 다른 것이다. 책에도 나오지만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순 없는 것’이다.
뒤라스의 가장 마지막을 지킨 연인이자 친구였던 얀은 이 소설을 읽은 뒤 뒤라스의 ‘신도’가 되어 평생 그녀를 숭배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몇십 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그녀의 연인이자 친구이자 비서이자 하인처럼 복무했다고도 한다. 나에게는 솔직히 그 정도(뒤라스의 노예가 될 것을 결심할 정도 ㅋㅋ)까지는 아니었으나 ‘사랑’에 관한 어떤 통찰을 준다는 점에서 그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올여름은 기나긴 장마와 코로나 때문에 보통 때의 여름과는 사뭇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여름은 여름인 것. 집에서 이 책을 읽으며 휴가를 떠난 기분을 만끽했다. 여름 휴가지에 가장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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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뿐만 아니라 욕망 또한 그토록 변치 않고 오래간다면, 그 역시 절망이 될 수도 있으리라. 누가 알겠는가? -p.39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모든 면에서 가장 겁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큰 위험을 무릅쓴다는 거.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감히 절대 엄두를 낼 수 없는 것까지.”
“공포심과 위험은 결국 같은 거니까.”
“그럴지도. 위험을 무릅쓸 용기를 주는 게 바로 공포심일 수도 있지. 혼자서 두려움에 떠느니 차라리 뭐든 하는 거지.” -p.140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는 강물을 마주한 채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