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독서>
시를 즐겨 외우고 소설을 사랑하던, 훗날 역사나 문학을 전공하려던 한 고등학생은 어느 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 언니의 의사가 되라는 성화에 못 이겨 이과로 진로를 바꾼다. 공부야 잘했으므로 수업을 따라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문제는 의사가 왜 되어야 하는지, 의사가 되어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것. 결국 그는 언니에게 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서울에서 책을 좀 구해 보내달라는 조건을 내걸고, 언니는 조건에 맞추어 <인턴 X>와 <성채>를 보내준다. 해당 책을 읽은 고등학생은 그리하여 언니의 바람대로 의사가 되는데...
마치 옛 한국 소설의 줄거리 같지만 실제 있었던 일로 감염내과를 전공한 뒤 현재 아주대 병원에 재직 중인 최영화 교수의 사연이다. 이리 말하니 마치 잘 아는 사람, 혹은 원래 알던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나 역시 이번에 <감염된 독서>라는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된 내용이다. 문학을 사랑하던 고등학생은 어릴 적 장래희망과는 다르게 의사가 되었으나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여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까지 내게 되었다. 그야말로 소설 속 이야기 같다. <인턴 X>와 <성채> 둘 다 읽어보지 않았는데 엄청난 책일 듯하다.
제목만 보면 ‘감염’이라는 단어 덕에 살짝 수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책은 실은 ‘질병’, 그중에서도 주로 감염병을 화두로 다루는 서평집이다. 그렇다고 무슨 질병 전문 서적만을 분석하여 리뷰하는 딱딱한 책일까 봐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다. ‘감염병’은 그야말로 소재일 뿐, 실제로는 온갖 소설, 에세이, 시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50여 편에 걸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생과 사, 선과 악, 기쁨과 슬픔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폐병을 앓는 인물들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에 대해, 기 들릴의 <굿모닝 버마>를 통해서는 조류 인플루엔자가 유행할 당시 전염병이 도는 세상에서의 공포와 혼란을, 루쉰의 <형제>를 읽으면서는 성홍열과 홍역을 비교하며 생과 사의 갈림길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서머셋 모옴의 <인생의 베일>로부터는 콜레라와 싸우는 인물들을 통해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식으로 말이다.
서평집으로서 조금 특이한 지점은 특정한 책 한 권 한 권씩을 심도 있게 평하고 분석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사유를 뒷받침하는 형태로 책의 특정 장면을 차용해 땔감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즉, 한 편의 글은 한 권의 책 혹은 몇 권의 책에 대한 ‘서평’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그 생각에 걸맞은 특정한 장면들을 여러 권의 책에서 끌어와 적재적소에 배치한 일종의 건축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세이인지 서평인지 조금 정체가 불분명한 글들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듯하다. 일단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글들이니까. 인용문은 참으로 적절하며, 인용문에 대한 설명 또한 참으로 생생한 동시에 흥미로워서, 개별 글에 감탄하게 되는 것과 동시에 인용한 책들을 모두 읽어보고 싶도록 만든다. 인용문의 분량이 기존의 다른 서평집들 대비 꽤나 길어서 해당 책에 대한 흥미를 배가시켜주기도 한다. 실제로 이 책을 읽고 여기 실린 책 중 5권 정도를 새로 구매했다.
코로나로 시끄러운 요즘, 더군다나 감염병에 대한 주목도가 엄청나게 높아진 요즘 나왔으면 훨씬 더 큰 주목을 받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2년 전에 출간되었다. 물론 시기와 상관없이 아주 훌륭하고 재미있으므로 언제 읽어도 좋은 책이지만. 소싯적 문학도가 되려던 의사가 쓴 글답게 문장은 아름답고 글은 흠잡을 데 없이 유려하다. 병과 관련한 온갖 정보는 무척 유익하고 유용하기도 하다. 쉬운 글인데도 읽다 보면 마구 똑똑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내게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좋았던 지점은 동료 의사와 환자를 대하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었다. 의사, 환자, 청소부 아주머니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고루고루 가 닿는 그 시선.
저자는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한 동료를 바라보면서 그가 비록 괴팍하기는 하지만 험하고 무서운(?) 수술을 거침없이 해낼 수 있는 것 또한 그의 괴팍한 성격 덕분이라고 칭찬하기도 하고, 화장실 구석구석에 놓인 청소 아주머니들의 살림(?)을 보면서는 마땅한 휴식공간 하나 없는 그들의 처지를 짐작하기도 한다. 또한 그렇게 세심하고 멀리 가는 시선에는 어줍잖은 연민 대신 훨씬 더 깊고 풍부한 배려와 존경이 들어있다. 버려진 야자수 화분을 주워다 죽어가는 다른 식물을 키우는 청소부 아주머니들의 사생활을 엿보면서, ‘비참하다’ 거나 ‘가엾다’ 대신 ‘재치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글이 좋았으나 그중에서도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고민한 꼭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헤밍웨이의 <인디언 캠프>라는 단편 속에는 의사 부자가 인디언 아내의 제왕절개 수술을 성공시키는데 눈이 팔려 그 옆에서 남편이 목을 긋고 죽어가는 상황은 안중에도 없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저자는 그 장면을 들며 환자를 자신의 기술을 적용할 하나의 ‘기계’나 ‘도구’로만 대하는 것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의사는 등산용 칼로 제왕절개를 하고 낚싯줄로 봉합까지 해서 경기 끝나고 탈의실에 온 축구 선수처럼 뿌듯함에 수다스러워졌지만 사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산모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고, 아이는 꺼냈지만 침상 위 남편이 그사이 목에 칼을 긋고 자살할 정도였는데 한 것이 없으며 본 것도 없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짐승이 새끼를 낳을 때도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인디언 가족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지요. 환자를 본다는 것은 시진을 넘어서 더 깊은 무엇을 보는 것까지 담고 있습니다.
영특한 학생들은 금세 마음과 눈을 열고 봅니다. 누워 지낸 지 얼마나 된 것 같으냐는 물음에 여름은 지나서 다친 것 같다고 대답한 친구가 있었지요. 햇볕에 그을린 팔을 보니 그렇답니다. 한겨울이라 흔적도 희미한데 보고자 하니 보입니다. 환자 보러 가, 환자를 봐야 해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본다는 것의 그 깊은 의미 때문에 눈 뜬 장님이 아니고자 고군분투하는 우리입니다.”(242쪽)
너무 거듭해서 말하는 듯 하지만 여러모로 정말로 좋은 책이었다. 진지하면서도, 밝으면서도, 냉정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이 책을 읽는 내내 기분이 무척 좋았다. 저자가 가진 특유의 유머감각 덕분에 심각한 내용에 대해 읽을 때조차 그러했다. 살면서 종종 느끼는 것은 인간은 여타의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연약하다는 지점이다. 너무나도 연약해서, 망가지기도 쉽고, 그리하여 추해지기도 쉽다. 그리고 그렇게 추하게 변해버린 인간을 경멸하거나 혐오하는 일 또한 너무나도 쉽다. 그러나 그렇게 추한 모습 가운데에서도 사랑스러운 지점을 발견하려는 것, 추하기 때문에 더 사랑하려는 것,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늘 내 마음을 움직인다. 그런게 너무 귀하고 드문 세상이라 이런 책을 읽는 것은 큰 용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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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라는 병은 이해와 경멸이라는 두 극단에서 줄타기하기 마련입니다. 남자의 마음은 이렇겠죠. 사랑하므로 열정과 욕망이 있고 소유하고 싶지만 병에 대한 통념으로 혐오의 마음도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한 동정의 마음과 어떤 이유로 이런 병에 걸렸을까에 대한 형벌이라는 무의식도 작용하고요. 이런 운명에 빠진 여자를 바라보며 병과 그녀 자체를 분리해서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냥 이쯤에서 끝내고 도망가고 싶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 약점를 악용해 자신한테 유리하게 관계를 이끌고 갈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p.94, 푸른 알약과 에이즈
난 세상을 떠돈 뒤에
더 늙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난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러나 난 갈수록 아는 게 적어진다. (파블로 네루다)
저는 정말 아는 게 적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109, 양파에 바치는 송가
작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에 문명국가에서 비상식적인 학살이 그리 악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과연 먼 나라에서 일어난 남의 일이었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믿느냐고, 당신 주변엔 그런 일이 과연 없느냐고 물어보면서 말입니다. -p.119, <이것이 인간인가>와 디프테리아, 장티푸스
“자 여러분! 606번째 화합물까지의 실험입니다. 대단하지요? 500번에서 멈출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끝내 갔지요. 그런데 이 실험은 누가 했을까요? 에를리히 선생이 했을까요?”
“아니요.”
학생들은 우렁차게 대답합니다.
“그럼 누가 했을까요?”
“조교들이요.”
“네,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름은 남기지 않았지만 이 실험은 아마도 실험실 연구원들이 다 했을 겁니다. 우리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시다.”
“우와. 짝짝짝.....”
우리는 신나게 박수를 쳤습니다. 사실 그 박수는 한 세기 전의 연구원들을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박수이기도 합니다. 우리 대다수는 지극히 평범해 한곳에 머무는 작은 인간으로서 평범한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다가 주변의 몇몇에게만 기억을 남기며 그마저도 한 세대 후에는 왔다가 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위로이고 격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그런 우리라고 해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p.216-217, <반 고흐, 영혼의 편지>와 항생제의 역사
의학은 다른 어떤 과학보다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늘 행위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면봉을 넣었다가 안 넣게 되고 방광을 소독액으로 세척하다가 안 하게 되고 이걸 소독액으로 쓰다가 저걸 쓰게 되고, 항생제를 이렇게 주다가 저렇게 주고......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외과 선생님들도 저처럼 회의를 하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할 겁니다. 확신만 가득한 의사라니, 믿기 어렵습니다. -p.226, <김수영 전집>
병원의 3월은 초심자들이 넘쳐나는 시절입니다. 저는 그들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립니다. 무서울 것입니다.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르면 모른다 말해야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래야 감각도 흐려지지 않을 겁니다. -p.260, <젊은이의 변모>
저는 이그나츠가 이 시절로 건너와 온 병동을 한번 돌아보면 무슨 말을 할까 그려봅니다. ‘제가 주장한 게 맞았군요. 손을 씻는 건 쉬운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믿으려 하지 않더군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쉬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윤리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대의 의사들은 그런 쉬운 일을 잘하고 있겠지요? 엄청 복잡한 기술로 사람들을 잘 살리고 있다면서요. 세월이 170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그 중요성을 잘 모르는 의사들이 있을 거라곤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p.268, <나라 없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