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비가 되고 싶어, 버드맨

아장아장 정치부 28│자본가 밑에서는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by 고승혁
나는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서 오늘은 비가 온다고 생각했다
차성환 「非」


버드맨. 라흐마니노프 들으며 비행 고고


별 게 아닌 문장도 시인이 쓰면 별 게 되었다. 화면에서는 나이가 들어 뱃살이 도톰해진 전직 배트맨이 라흐마니노프 2악장 2번에 맞춰 날아다니고 있었다. 궤적이 둥그스름한 비행은 현악기의 활처럼 팽팽하면서도 선율처럼 유려했다. 고명처럼 노란 캡이 얹힌 택시를 내려다보며 그는 핍스 에비뉴를 지나 대공황 시절 지었음직한 브로드웨이의 오래된 극장까지 뉴욕을 가로질렀다. 제 자리에서 빙그르르. 발레리나가 발끝으로 턴을 돌 듯 자연스레 창공에서 미끄러지며 과거의 영광을 반추했다.


늦가을 빛이 바랜 낙엽 색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전직 배트맨은 스펙터클과 예술의 반비례 법칙을 고안해냈다. 총알처럼 튀어올라 쏘아대듯 활강했던 전성기 시절의 비행에 비하면 지금의 몸짓은 예술적이었지만 스펙터클하지 않았다. 예전의 매력은 다 없어졌어. 영화배우 마이클 키턴이 윽박지르며 알전구를 깨부수는 영화「버드맨」(2014)을 보며 나는 내일의 출근을 위해 주름진 흑마늘 다섯 알을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마이클 키턴이 「배트맨 리턴즈」(1992)에 브루스 웨인 역으로 출연해 악의 구렁텅이에서 도시를 구해낼 때 나는 다섯 살이었다. 그땐 나도 배트맨처럼 어깨에 망토를 두르고서 사당동 구석구석 골목골목 왕이 되어 뛰어다녔다. 비록 남성중학교 옆 비디오 가게에 묶여 컹컹 짖어댔던 누렁이와의 전투에서 번번이 패배했지만 원래 영웅에겐 강력한 악당이 필요한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하루 월급을 받아내고자 홍삼과 흑마늘을 먹어가며 가까스로 출근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환상은커녕 체력도 없는 월급쟁이가 되었다.



영화「버드맨」은 전체를 한 번에 찍은 듯 매우 긴 롱테이크로 이뤄져 마치 헌법 전문처럼 숨을 헉헉 대며 봐야만 했다. 그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화면이 아침마다 갈까 말까 회사를 갈까 말까 정말로 국회에 가서 신문기사를 굳이 꼭 내가 써야만 하는가 대한민국의 정치가 나 같은 막내 기자 하나 없다고 안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당도 아닌 야당에 진정 그렇게 많은 기자가 필요한가 별 잡생각을 해대며 머리를 갸우뚱하다 간신히 내딛는 내 발걸음을 연상시켰다.

차라리 나도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아파트가 즐비한 서초구를 날아 조선일보 회장이 사는 동작구를 건널 수 있다면. 두 개의 테트리스 조각을 닮아 데칼코마니 마냥 좌우 대칭으로 생긴 여의도 쌍둥이 빌딩 사이를 비행해 민트색 국회 돔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다면. 내게 그런 초능력이 생긴다면 나는 아침마다 한 시간씩 잠을 더 잘 것이었다. 그렇다면 살이 저절로 빠지고 피부가 탱탱해지고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피로가 사라지고 눈은 맑아지며 뇌는 밝아져서 총명한 기운이 단단한 근육을 팽팽히 붙잡아 둘 게 분명했다.


노동자를 짜내면 돈이 나오지요


아냐. 네가 날아다니면 회사에서 너 보고 한 시간 더 빨리 출근하라고 그럴 걸. 친구는 담담하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자본가들의 악착같은 착취력을 환기시켜주었다. 나는 샛노란 비타민 음료를 삼키며 노동자를 부리는 자본가의 악덕함을 너무 가벼이 평가한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아아. 기자가 되어서 높은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더니 자본가를 마치 인간을 닮은 존재인양 상상하다니. 순치되었구나. 변했어. 변했어.

친구는 혀를 끌끌 차며 백태가 낀 지저분한 혀 끝으로 아랫니 뒤에 고인 침을 바깥으로 빼내었다. 나는 물과 아밀라아제가 결합한 투명한 소화액을 바라보며 짜 낼 수 있는 최대치보다 더 짜내고도 더 많은 산출을 강요하는 자본가들의 돼지 같은 식성을 떠올렸다. 그들은 내 인생을 1초라도 더 파괴해야 1원이라도 더 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고속철도가 생겼다고 더 여유롭게 출장을 다녀오는 것이 아니었다. 더불어민주당 출입기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광주로 출장을 다녀왔다. 야당 지도부는 선거 전에 의지를 다지고 호남 적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광주에 갔다. 선거 중에는 지지를 호소하고 세를 과시하기 위해 광주에 갔다. 선거 후에는 이겼든 졌든 감사인사를 하러 광주에 갔다. 보궐선거가 끝난 뒤 총선을 치르고 총선이 끝나면 당대표 선거를 한다. 당대표 선거를 한 뒤에는 대선후보 경선을 해야 했고 경선이 끝나면 대통령 선거가 있다. 대통령이 선출되면 지방선거를 해야 했고 지방선거가 끝나면 다시 보궐선거를 한다. 그러니까 야당 지도부는 그냥 광주에 자주 간다.


실종된 광주 찾으러 자주 간다


문제는 야당 지도부를 쫓아다니며 기사를 쏟아내는 기자들의 인생이었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초능력 기차가 생겼으면 당연히 출장 일정이 더 여유로워지고 시간이 넉넉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나는 빡빡한 일정을 초조하게 소화했다. 문제는 초능력이었다. 무궁화호 시절이었으면 광주 출장을 1박 2일로 다녀왔을 텐데 이제는 KTX를 타고 하루 만에 갔다 와야만 했다. 당연히 업무량이 늘어나고 일정은 더 바빠졌다. 파발마를 타고 광주목에 가서 한성부로 장개를 올리던 시절이 부러웠다. 조선시대라면 아무리 악독한 직장도 직원을 1박 2일 일정으로 광주에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실시간으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쏘아대고 노트북으로 국회의원의 말을 받아치는 정치부 기자를 보며 오랫동안 정치판을 지켜온 당직자들은 하나같이 불쌍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너희 선배들은 술 마시고 자고 8면짜리 신문 만들면서 떵떵거렸단다. 당직자와 의원들은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기자들이 얼마나 살만 했는지 폭로하며 나를 놀려먹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문자메시지 9 통과 카카오톡 메시지가 58개가 들어왔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부르르 부르르 떨렸다. 활성산소가 전자를 빼앗아 피로감에 푹 절은 나의 대뇌 전두엽도 부르르 부르르 떨렸다.


이왕 노비짓 할 거면 진짜 노비처럼 대우 해주던가 흑흑


나는 아무래도 노비가 되고 싶었다. 역사책을 보니 자애로운 양반님들은 노비에게 일을 주고 집을 주고 밥을 주고 장가도 보내주었다. 악독한 자본가들은 일만 주고 나머지는 다 빼앗았다. 푼돈을 조금 쥐어주긴 했는데 그것으로는 끼니나 겨우 해결할 정도였다. 죽어버리면 야근을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입금하는 것 같았다. 집은 돈을 빌려서 사야 했는데 그러면 이자라는 명목으로 내가 오히려 자본가에게 돈을 내야 했다. 노비들은 양반을 위해 일을 하니까 양반이 집을 줬는데, 노동자들은 자본가를 위해 일을 하고 자본가에게 집값도 냈다. 그나마 주는 돈도 결국 다 빼내었다. 이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단어의 실체적 뜻이었다. 나는 왕도 양반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구가 없어서 해가 지면 그냥 집에 누워 머리카락에 숨은 이나 잡으면서 살고 싶었다. 지금은 너무 괴로워 살기가 벅찼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하루 종일 감언이설을 내뱉는 정치인 곁에서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는 일은 너무 아이러니해서 희망조차 갖기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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