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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안과수화 Mar 21. 2019

순위를 모른다는 것

올초에 뮤직 플레이어 어플을 바꿨다. 네이버 뮤직에서 바이브로 교체한 거라 속칭 갈아탔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 것 같다. 아무튼 어젯밤과 오늘 경험한 일을 위해 적는다. 마감을 끝내고 아침 7시경 퇴근해 종일 잤다. 일어나니 밤 11시. 부재중 전화와 카톡이 가득했지만 무시하고 TV를 켰다. 라디오스타를 봤는데 방송 말미에 장범준이 <벌써 12시>를 부르더라. 너무 좋아서 검색해보니 청하의 노래였다. 심지어 음악 플레이어 상위에 랭크되었던 곡. 일전에 CF를 통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좋다 생각했지만 이내 까먹었다. 왜 였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바이브의 UI, UX디자인이 탓(덕)이다. 바이브는 차트 순위가 아닌 사용자의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완성한 믹스테잎을 메인 페이지에 배치한다. 차트는 그다음 페이지다. 워낙 신곡과는 무관한 음악 취향을 가졌으니 청하의 <벌써 12시>는 내게 한 뼘 멀리 있는 노래다. 요즘 내 믹스테잎은 더 정교해져서 중고등학교, 대학 때 듣던 마이앤트메리, 토마스 쿡, 앤드의 노래까지 추천해준다. 힙빠로서 저스디스의 숨은 곡들을 추천해준 건 감동적이었다. 점점 신곡, 인기곡에서 멀어진다.


지금 나는 미술관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미술관으로 오기 전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서점에 들렀다. 마감 직전 주말에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3-4시간을 보냈던 터라 매대, 평대는 가볍게 지나쳤다. 내가 관심을 두는 장르의 서가에 서서 책을 구경했다. 디자인, 예술 서가에서 고른 두 권의 책을 계산하고 나오는 데 베스트셀러 코너에 눈길이 갔다. 2주 사이 모르는 책들이 놓여 있었다. 역시나 읽고 싶은 책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 음악, 색이 점점 명확해진다. 새로 생겼다거나 출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더이상 설득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옷과 책, 장소 같은 취향에도 심각한 편식이 생긴다. 몸에 맞지 않는 것들에 조금씩 피곤을 느낀다. 일도 에디터 초년생일 때에 비하면 뾰족해졌다. 내게 익숙한, 또 나를 찾아주는 분야가 생겼다. 주로 디자인, 건축, 호텔, 연예인, 지식인들에 관해 취재하고 쓴다. 그렇다고 분야의 최고, 최초, 새로운 것에 대해서만 쓰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 이야깃거리가 될만한 걸 기획해서 쓴다. 남들한테 기자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때가 종종 있는데 아무래도 업계 최전선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럼에도 나처럼 삶의 태도와 일의 방식이 부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큰 축복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학창 시절부터 경쟁을 참 싫어했다. 매 순간 친구들과 경쟁할 수 없어서 대학도 정시로 갔다. 어제와 똑같은 내가 남에게 지고 이기는 게 무슨 의미일까.


요새 고민은 이렇게 순위라는 트랙에서 자의적으로 멀어져 가는 나 자신이다. 잡지는 단행본과 다르다. 몇 쇄를 찍었는지로 계산되는 단행본과 달리, 잡지는 광고 매출, 판매부수로 매달의 스코어가 나타난다. 잡지업계는 작아지고 어느 분야든 순위는 계속 바뀐다. 순위에서 상위를 선점한 음악, 가수, 영화, 책들은 소위 팔리는 컨텐츠다. 나는 그것들을 팔로업하고 섭외하는 데에 공을 들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만드는 책도 팔린다. 요새 나는 그 일에 조금 숨이 막힌다. 또 한편으로 그걸 경계하고도 있다. 아무런 이유없이 누군가의 인기에 편승해 섭외하고 이슈를 만들려는 기자로서의 욕심을 걱정한다. 휘발되는 소재, 뉴스는 인터넷에도 많다. 굳이 종이를 낭비하며 소모될 걸 만들고 싶지 않다. (순위라는 트랙에서 떨어지는 순간 유행, 젊음 같은 것들과도 멀어지는 건 아닐까 고민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고민은 하지 않는다.)


언제금 다시 보아도 좋은 걸 쓰고 싶다. 이 때는 이런 사회상, 생각, 삶이 있었구나 싶은. 혹은 시대를 초월해 통용되는. 물론 때론 ‘최고’, ‘인기’가 그 시대를 제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좀 더 일상적인 이야길 하고 싶다. 그 생각이 깊어질수록 단행본을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한다. 한 달이라는 주기는 참 애매하다. 새로운 걸 담기엔 늦고 깊이 파고들기엔 짧다. 내가 원하는 매체가, 그런 이상적인 매체가 있긴 할까. 홀로 무언갈 만들까도 생각해본다. 새로운 걸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 길었다.

언제 다시 보아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언제 어디선가 누군가는 나의 글을 읽을테니.


몇 자 적어야겠다고 생각한 후 바이브 어플을 뒤적여보니 백예린과 에픽하이의 새로운 곡들이 상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그들의 신보들을 늦게 알게 된 건 조금 애석하다. 그럼에도 바이브는 그 어떤 뮤직 플레이어보다 내게 최적화된 어플이다. 그게 나는 편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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