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효율이라는 이름의 지적 파시즘

비효율을 거부하는 시스템

by 김승주

현대의 우리 사회, 특히 대한민국은 배금주의라 선언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17개의 선진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았다. '침팬지가 사람보다 일을 더 잘하면 침팬지를 고용하는 게 기업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윤리와 도덕의 가치는 떨어지고 돈이 되냐 안되냐의 이분법적 논리가 한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이 비극의 심장부에는 '효율'이라는 이름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효율은 곧 정의이며 정답이다. 그 외의 모든 선택지는 제거해야 할 비용이자 '오답' 혹은 '오류'로 전락했다. 이러한 풍토는 우리가 인공지능이라는 도구를 대하는 태도에 그대로 투영된다. 우리는 AI를 통해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더 빠른 성과를 내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소멸 중인 '인간의 고유한 사유'에는 눈을 돌리고 있다. 이 지독한 실용주의가 결국 우리를 사고하지 않는 존재로 몰아갈 것이다.


우리는 자발적인 판단의 외주화 시대를 살 것이다. 과거에는 무엇을 먹을지, 어떤 길로 갈지, 어떤 정보를 믿을지를 결정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숙고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최적의 경로'를 따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다. 스스로 고민하는 행위는 시간 낭비이자 기회비용의 손실로 취급받을 것이다. 시스템이 제공하는 정답에서 벗어나는 행위는 개성이 아니라 '시스템에 대한 불응'이자 '사회적 비용의 발생'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 지적 파시즘의 본질이다.


만약 시스템의 권고를 거부하고 자신의 직관을 따랐다가 실패했을 때, 그 개인이 짊어져야 할 사회적·법적 책임은 막대하다. 반면 시스템의 정답을 따랐을 때 발생하는 오류는 '불가항력적인 기술적 한계'로 면죄부를 받는다. 이 비대칭적인 책임 구조가 안착되면 인간은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판단력을 거세할 것이다.


알고리즘의 추천 없이는 볼 영상조차 고르지 못하고, 챗지피티 없이는 공부도 업무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듯 우리 역시 알고리즘이라는 환경 속에서 우리의 의사결정이 어떻게 조작되고 수축하는지 느끼지 못한다. 이건 기술적 진보라고 봐야 할까, 존재론적 퇴보라고 봐야 할까?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시스템이 제공하는 안락함에 온전히 안주하고 의존하는 순간 우리는 '주체적 존재'에서 '시스템의 유지보수를 위한 생물학적 단말기'로 퇴행한다. 아니, 그 역할마저도 시스템이 자체적으로 수행할 것이다. 이는 '유토피아의 문제'의 실현이다. 혹자는 이것이야말로 기술의 진보며 인류를 구원할 특이점이라 주장하지만, 내 눈에는 인간이라는 종이 스스로 주권자의 지위를 내려놓는 존재론적 항복 선언으로 비친다.


난 결코 러다이트 운동을 지지하는 반기술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기술적 과도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앞으로 우리는 수많은 질문을 맞닥뜨릴 것이다. 시스템이 내놓은 정답을 '승인'만 하는 존재를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효율이라는 이름의 독재에 저항하여, 비효율적이더라도 스스로 고민하고 실패할 자유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머지않은 미래에 이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전 03화1장. 전지적 도구에서 닮은 존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