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소크라테스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있는가
이 시점에서 짚어야 할 주제가 있다.
주체적인 선택의 중요성을 말하며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할 때 반드시 마주하는 거대한 벽이 있다. 바로 '생존'이다.
선택은 공기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선택에는 언제나 비용이 따른다. 그리고 그 비용을 가장 안정적으로 지불할 수 있는 수단이 자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는 없지만 삶을 덮쳐오는 불행의 파도를 막아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파제는 자본이다.
현재의 인류가 유한한 수명을 지닌 생명체인 한 생존에 대한 본능적 욕구는 그 어떤 철학적 가치보다 우선시 된다. 당장 오늘의 끼니와 잠자리가 불안정한 이들에게 "알고리즘에 의존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사유하라"는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이자 기만일 뿐이다. 생존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선택권 그 자체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가장 간편하고 효율적이며 체계화된 도구다. 이 사실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며 현실에 대한 기술일 뿐이다. 따라서 본서가 효율을 비판한다고 해서, 생존을 위해 효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개인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비난은 부당하며 무의미하다.
문제는 자본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본이 목적이 되는 순간이다.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던 효율이 삶을 지배하는 목적 그 자체로 승격되는 순간 인간의 선택지는 급격히 단순화된다.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더 빠르고 더 수익이 되는가만이 질문으로 남는다. 이때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최적화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가 생존권을 확보해도 여전히 효율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혹은 축적된 자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다시금 알고리즘의 품으로 뛰어든다. 이때부터 자본은 불행의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가 아니라 달콤한 사료가 된다.
배고픈 자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지만 배부른 자가 선택을 포기하는 것은 타락이다. 이 책이 겨냥하는 지점은 전자가 아니다. 생존이라는 절박한 숙제를 자본과 기술로 해결한 인류가 그 안락함에 취해 자신의 주권마저 시스템에 헐값으로 넘겨주고 있는 현상에 대한 경고다.
만약 내가 효율만을 맹목적으로 좇는 시대를 비판한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헛소리냐.”
그 반응은 틀리지 않다. 오히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생존이 인간의 모든 사고를 점령하면 우리는 인간으로 남아있기 어렵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선택권을 포기해야 하는 구조라면 우리는 그 구조를 자연 질서가 아니라 설계된 환경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질문은 그다음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정말로 효율과 생존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효율이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도록 설계된 적은 없었던 것인가.
우리는 자본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본을 철저히 도구로 부려 생존의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그 확보된 영토 위에서만 비로소 'Homo Elector'로서의 진정한 선택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받쳐주는 생존의 토대 위에서 우리는 시스템이 대신 계산해 줄 수 없는 '삶의 의미'를 비로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