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유토피아 역설

결핍이 거세된 사육장의 안락함

by 김승주

우리는 3장에서 자본과 생존권의 엄중함을 인정했다. 불행의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로서의 자본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만약 인류가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을 돌파하여 그 어떤 파도도 넘어올 수 없는 '완벽한 방파제'를 구축한다면 어떻게 될까?


초지능(Artificial Superintelligence)의 구현이 현실화된 미래를 가정해 보자. 도구로서의 AI가 궁극의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곧 인간 사회 시스템의 '최적화'가 완료된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자원 배분의 비효율은 사라지고 생산성은 극대화된다. 우리가 막연히 꿈꾸던 완전한 사회, 사전적 의미의 유토피아가 물리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 세계의 풍경은 겉보기에 완벽하다. 가난, 질병, 기아와 같은 모든 종류의 결핍과 고통은 시스템에 의해 소거된다. 인간이 기피하던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노동은 AI와 로봇으로 완전히 대체된다. 물론 인간이 원한다면 노동을 '체험'할 수는 있겠지만, 생존을 위해 땀 흘릴 필요는 없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경제적 자유를 누린다.


정치와 행정의 풍경도 달라진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끝없는 논쟁과 토론을 벌일 필요가 없다. 실시간으로 수집되는 통계 데이터와 초지능의 연산이 가장 공리적인 정책을 '자동 선택'하여 집행하기 때문이다. 오류 가능성이 있는 인간의 주관적 판단보다 데이터에 기반한 시스템의 판단이 항상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과를 도출한다.


이 완벽한 체제에 반기를 드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독재에 저항하는 것은 그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지만, 안락함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누가 이 완벽한 풍요를 버리고 다시 결핍과 노동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외치겠는가? 비효율적인 논쟁을 위해 안락한 삶을 포기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시스템은 폭력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안락함으로 인간을 제압한다.


그러나 이 천국에는 치명적인 역설이 숨어 있다. 모든 것이 최적화된 세계에서 인간은 더 나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변화해야 할 결핍이 없기에 변화의 동력도 사라진다. 이미 '완벽하게 완성된'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서서히 길들여진다.


시스템은 인간의 안전을 위해 모든 변수를 통제한다. 위험한 선택, 비효율적인 경로, 불필요한 모험은 사전에 차단되거나 알고리즘에 의해 교정된다. 인간은 이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 차단이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육장'이라 부른다. 동물원의 맹수가 야성을 잃는 것은 먹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의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실패할 가능성이 0%로 수렴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도전하는 근육을 잃어버린다. 인간과 시스템의 주종관계가 역전되는 것이다. 유토피아 속의 우리는 자발적으로 목줄을 건네며 시스템이 정해준 울타리 안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이것을 '애완동물화'라 불러야 한다. 애완동물의 삶을 보라. 주인에게 사랑받으며, 굶주리지 않고, 포식자의 위협도 없으며, 가장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받는다. 하지만 애완동물에게는 단 하나, '문 밖으로 나갈 권리'가 없다. 애완동물은 주인이 허락한 울타리 안에서만 마음껏 활동할 수 있다.


유토피아에서 인간의 선택은 언제나 '시스템적으로' 성공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선택은 절대로 '오답'이 될 수 없다. 시스템이 오답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스템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정답의 길만을 걷게 된다. 넘어질 수도, 길을 잃을 수도 없는 삶. 그것은 축복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선택권의 완전한 박탈이다.


틀릴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곳에서 '옳은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경로를 따르는 순응만이 남을 뿐이다. 결핍이 거세된 유토피아에서 인간은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서서히 멸종해 간다. 이것은 비극이 아니다. 주체성을 거세당한 종(種)이 맞이할 수 있는 가장 평온한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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