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라비오 May 07. 2020

나는 왜 스페인으로 왔나?

플라비오와 스페인의 첫 만남

스무 살이 되기 직전 겨울, 나와 형은 유럽으로 떠났다. 

"형이랑 여행 가서 추억 쌓고 와라. 지금 안 가면 언제 둘이서 여행 가겠니?"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지만, 우리 형제의 40일 유럽 여행은 엄마의 적금 통장 덕분에 가능했다. 형은 군대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복학생이었고, 나는 대학 입시를 막 끝낸 예비 재수생이었다. 엄마의 예상은 맞았다. 그 후로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그동안 형과 단 둘이 여행한 적은 없으니... 게다가 이제는 서로 다른 나라에 있으니 더욱 힘들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축구 경기에서만 보던 유럽으로 떠났다. 


처음으로 밟은 유럽 땅


잉글랜드를 시작으로 네덜란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 프랑스까지. 

한국 사람들이 주로 갔다는 곳은 빠뜨리지 않고 갔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스페인은 한국 사람들이 잘 안 가는 곳이었지만, 전공으로 스페인어과를 지망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일정에 꼭 넣었고, 체류 기간도 가장 길게 잡았다. 스페인어는 다른 이유보다도 그냥 스페인 축구가 좋아서 스페인에 관심을 갖게 됐고, 좋아하게 됐다.


유럽은 역시 유럽이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유럽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니 신기했다. 줄 지어 서있는 고풍스러운 건물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오래된 간판,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교통 표지판,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길... 이 모든 게 내 눈길을 끌었다. 우리는 최대한 많이 유럽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며 천천히 관광을 다녔다.  


역시 우리 형제의 가장 큰 관심사는 유럽 축구였다. 물론 다른 유명한 관광지에도 다 가봤지만, 어느 도시에 가든 축구장은 빼놓지 않고 들어갔다. 스타디움이 없는 작은 도시라면 시에서 운영하는 축구장이라도 가서 아마추어 경기를 직관하며 "역시 유럽은 시립 축구장도 잔디가 있구나"하며 감탄했다.


드디어 밟은 스페인 땅


그렇게 서, 중부 유럽 관광을 만끽하다가 드디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가는 일정에 다다랐다. 스위스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 탑승을 기다릴 때의 설렘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스페인은 물론 축구 때문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됐지만, 그것보다도 그 당시 대학 입시를 위해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현지인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우리는 첫 번째 스페인 여행지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드디어 익숙한 스페인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위에 있던 현지인들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공항에서 짐을 찾고 미리 알아본 유스 호스텔로 출발했다. 공항 셔틀버스 창밖은 이미 어둑어둑했고, 날씨는 쌀쌀했지만 내 마음은 왠지 모르게 따뜻했다. 

"처음 와 본 나라인데, 엄청 친근하네."

단순히 언어를 이미 배웠기 때문에 느낀 친근함은 아니었다. 그 전까지의 일정에서는 유럽을 "역시 유럽"이라는 나의 문화와는 많이 동떨어진, 동경의 시선으로 봐 왔다면, 나에게 스페인은 유럽이긴 하지만 그렇게 "역시 유럽" 같지는 않은 여러 문화가 혼재된 나라였다. 이 느낌은 나중에 스페인 남부로 내려갈수록 더 커졌다.


카탈루냐 지방의 심장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한 스페인 여행은 나에게 스페인을 더 알고 싶게 만들었고, 여행하면서 만난 스페인 현지인들은 나에게 스페인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게 만들었다.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바르셀로나에서 우리는 남들 다 가는 가우디 건축물 루트도 따라갔지만, 역시 바르셀로나 하면, '바르사(Barça)' FC 바르셀로나의 성지 '캄프 누(Camp Nou)' 경기장을 찾아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캄프 누(Camp Nou)'에서 최고의 스타 호나우징요를 직접 봤고, 비록 플라멩코는 스페인 남부 지방 안달루시아에서 유래됐지만 내 인생 첫 플라멩코를 관람한 바르셀로나 레이알 광장의 '타란토스 (Tarantos)' 공연장 역시 기억에 남는다. 


바르셀로나 다음으로 우리가 향한 곳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였다. 바르셀로나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바르셀로나는 시끌벅적하고 어딜 가든 북적거렸다면, 마드리드는 의외로 차분하고 조용했다. 물론 8년 넘게 마드리드에서 살고 있는 지금은 별로 그렇게 느끼지 않지만, 나의 마드리드에 대한 첫 느낌은 그랬다. 우리는 마드리드의 중심에 있는 그란비아 쪽에 숙소를 잡고 마드리드 관광을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당연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경기장. 마침 다음 날 레알 사라고사와의 리그 경기가 있었다. 아무런 고민 없이 경기 티켓 두장을 사고 경기장 투어도 했다. '이곳이 베컴의 팀입니까?'


솔 광장, 마요르 광장, 산 미겔 시장, 마드리드 왕궁,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와는 다른 느낌의 도시였지만, 마드리드에 있는 5일 동안 정말 행복했다. '아... 언젠가 여기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 하몽과 멜론을 한꺼번에 먹으며 생각했다.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다.

마드리드 근교 톨레도를 거쳐 우리는 남부로 계속 내려갔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은 확실히 이슬람 분위기가 많이 났다. 크디큰 안달루시아 지방 중에서 우리는 세비야와 그라나다를 선택했다. 특히 세비야는 지금도 나의 '최애' 도시 중에 하나다. 내륙에 있기 때문에 습하지 않고, 당시 겨울이었음에도 사람들이 반팔을 입고 다닐 정도로 날씨가 따뜻했다. 이슬람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와 분위기... 그리고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정을 느낄 수 있어서 더 인상이 깊었다. 외국인에게 정을 느낀다는 게 무엇인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


물론 세비야 FC 축구 경기장 역시 빼놓지 않고 갔다. 마침 컵대회 경기가 있었는데 세비야 FC의 상대팀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팀이었다. '라요 바예카노(Rayo Vallecano)'?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나중에 라요 바예카노의 5년째 소시오 회원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람 일은 정말 모른다.


마드리드 세 번째 클럽 '라요 바예카노(Rayo Vallecano)'. 나는 5년째 소시오 회원이다. 


이런 작은 인연들이 우연히 모여 지금까지 스페인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와 스페인의 인연은 그렇게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갑작스러운 유럽 여행으로 인해 시작됐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산 지 벌써 8년이 됐다. 해가 지날수록 스페인에서 처음 느꼈던 설레는 감정은 무뎌지고 하루하루가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 되어 버렸다. 처음 스페인에 왔을 때 신기해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되었다. 그만큼 이 곳 생활에 적응을 잘 해왔다는 뜻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작지만 매우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사는 건 아닌가 싶다. 내가 한국에 사는지 스페인에 사는지 가끔 헷갈리기도 하는 요즘, 오랜만에 스페인과의 첫 만남을 상기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