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든 젓가락의 길이

중년의 요리 도구

by seungmom

매번 아이들이 있는 미국을 떠나기 전에 석 달치의 요리를 해 두는데

그 요리를 만들면서 썼던 젓가락 끝이 부러졌다.


약 25년 전에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후배가 사은품으로 몇 개나 받았다며

여러모로 잘 쓰인다고 요리도 못하는 나에게 이럴 때 받아 두라면서

막 떠밀어 별로 쓸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 엄청난 커다란 웍같은 냄비를

여행 가방에 겨우 넣어서 일본까지 가져가 한 번도 안 쓰고 모셔 두었다.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손잡이는 양쪽으로 있는데 밑은 둥글고 깊이가 있어

일본 집에서는 이것보다 큰 냄비도 양푼도 없을 정도로 큰 것이 가벼웠는데

유리로 된 뚜껑은 엄청 무거워 요즘과 다른 진짜 유리로 만들진 것 같았다.


이걸 다시 미국으로 가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상자에 넣어 배로 부쳤더니

냄비가 찌그러져 내가 수건을 대고 망치로 두드려서 뚜껑이 닫히도록 했는데

그 냄비가 아이들이 커 가면서 먹는 양이 많아지니 간혹 쓸 일이 생기더니

내가 미국을 드나들기 시작하고부터는 엄청나게 유용한 냄비가 되었다.


그 냄비에 한가득 김치찌개를 하면 10개 정도의 냉동 김치찌개 봉지가 되고

볶음밥 용으로 각각의 야채를 따로 볶아서 합할 때도 이 냄비가 아니면 안 되었다.

이 커다란 냄비를 쓸 때엔 항상 같이 사용했던 나무젓가락을 쓰도록 했는데

냄비가 얇아서 그런지 잘 눌어붙어서 바닥을 박박 긁으면서 저어야 했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을 하려고 김치 한통을 사다가 볶음밥 용으로 김치를 썰어두고

나머지는 찌개로 하는데 이걸 모두 하루에 해 치웠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볶음밥 용으로 만들어 나눠서 얼리고 삼겹살을 살짝 구워서 기름을 빼고

고기 위에 김치를 듬뿍 올려서 찌개를 만들면서 김치 국물이 한 사발 정도 남았다.

하루에 다 해 치우는 것은 무리여서 그저 상하지 않게 찌개를 한번 끓여 두고

아이들이 냉동된 찌개를 끓일 때 두부를 넣어서 먹어도 간이 맞도록

힘이 날 때 다시 제대로 끓이면서 찌개가 좀 더 진하게 되도록 했었다.


그래서 그 한 사발의 김치 국물을 소중하게 냉장고에 보관하려니 살짝 넘치려고 해

아예 얼려두면 넘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

하루가 지난 김치 국물은 생각보다 꽁꽁 얼어 칼로 흠집을 내어 보다가 관두고

어느 정도 녹아서 이젠 건드리면 떨어져 나오겠지 하면서 젓가락으로 꾹꾹 쑤셔서

조각을 내려고 비트는데 성공을 하고 그 덩어리를 김치찌개에 넣어 다시 끓였다.


이젠 김치찌개가 식으면 나눠서 얼리기만 하면 된다고 큰일을 했다고 씩 웃었는데

내 손에 들려진 젓가락의 길이가 이상했다.








한쪽이 뭉툭한 게 왜? 하면서 두 개를 맞춰보니 길이가 다르고 그 원인을 찾으니...

그럼 그 조각은 어디에...


큰일을 했다고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가 눈까지 크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그 조각은 다시 얼고 있는 김치 국물이나 큰 냄비 한가득 끓고 있는 김치찌개에...


김치 국물을 녹여서 휘저어 봤는데 생각보다 조각이 작은지 표가 나지 않아

할 수 없이 국물을 체에 걸러 손으로 건더기를 주물러 가며 확인을 하는데

여기서 나오지 않으면 저 큰 냄비 속을 어떻게 뒤져야 하는지 머리가 아파

아예 딸에게 김치찌개를 먹을 때 조심해서 먹으라고 하는 편이 나을까 했는데

다행히 그 조각은 김치찌개가 아니고 김치 국물에 있었다.








그 소란이 진정되니 젓가락이 다시 눈에 들어왔는데

한 짝인 젓가락의 길이가 조각을 붙여놔도 달랐고 새것과도 달랐다.

엄청 긴장하면서 찾아낸 조각을 버리지 못해서 놔두었더니

딸은 이런데도 미련을 둔다면서 그냥 젓가락을 버리라고 했다.

그런데 왠지 그 젓가락의 길이가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기록 같아서

버리지 못하고 같은 길이로 만들어 쓰기로 했는데...


딸은 볼 때마다 궁상이라고 야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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