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이직을 앞두고 2주가량 자유 시간이 생겼다. 쉴 틈만 보이면 훅 떠나버리는 K-직장인답게 12박 13일 호주&뉴질랜드 여행을 다녀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해외여행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으나 인생 여행지가 돼버려 글을 안 쓰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호주에서는 시드니와 멜버른, 두 도시를 다녀왔다. 뉴질랜드는 남섬여행(from 퀸스타운 ~ to 크라이스트처치)을 계획했다. 이번 글에서는 시드니에 대한 여행기를 쓰고자 한다.
시드니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오페라 하우스'다. 미디어에서 보던 건축물을 직접 본다는 생각에 설렘 가득했다. 실제 마주한 오페라 하우스는 기대 이상으로 크고 웅장했다. 거대한 건축물이 주는 압도감과 단단함 속 굳건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몇 분 동안 미적 감탄만 하고 있으니 조금 심심해졌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까지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속으로 아쉬워하며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은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달리는 사람들에게 꽂혔다. 호주 여행을 하며 인상 깊었던 건 어딜 가든 러너(Runner)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엔 신기했고 다음 날엔 멋있어 보였다. 마지막 날엔 나도 저들처럼 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즉, 내가 지금 달리기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호주 여행에서 비롯됐다. 한국으로 돌아가 내 일상에 달리기를 넣어야 하는 동기부여가 됐기 때문이다. 물론 달리면서 좀 더 구체적인 모양을 잡게 된 건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를 읽고 나서다.
강렬하게 '여기가 시드니구나'를 느꼈던 장소는 '본다이비치'다. 강렬을 넘어 충격적이었다. 평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일광욕 중인 사람, 비치발리볼 하는 사람, 누워서 노래 듣는 사람 등... 지구에서 가장 여유로운 사람을 겨루는 시합 같았다.
평소 계획적인 여행을 좋아하지만 여기서 만큼은 느긋이 구경할게 아니라 판단했다. 계획에 없었던 바닷속을 뛰어들고자 수영복 가게로 향했다. 마침 세일하고 있던 수영복을 사서 갈아입었다. 생각보다 바닷물은 차가웠지만 내리쬐는 햇빛에 몸을 맡겼다. 마냥 좋았다. 이렇게 원초적인 웃음을 지은 적이 언제였나 싶다.
호주 러너들은 본다이비치에서도 마주할 수 있었다. 그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러너가 있다. 물놀이를 하느라 휴대폰을 포함한 모든 짐들을 물품보관함에 맡겨둔 상태였다. 즉, 지금이 몇 시인지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계획 없이 시간 보내더라도 현재 시간을 모르겠으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인상 좋아 보이는 러너에게 가서 수줍게 물어봤다.
Excuse me, what time is it now?
초등학교 영어 수업시간에 배운 회화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러너는 걸음을 멈추고 어떤 한 건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은 4시 30분이야, 저기 보여? 저기 시계가 있어!" 그리고 찡긋 웃어주셨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같은 남자에게 스윗함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저렇게 멋있을 수가...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당시 속으로 생각했던 한 마디가 있다. '와 씨, 겁나 멋있네'
호주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불리는 '블루마운틴'은 관광객들에게 인기 많은 국립공원이다. 블루마운틴이라는 이름은 천연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내뿜는 안개가 파랗게 보이는데서 따왔다고 한다. 투어 내내 가이드(제이) 설명은 가히 놀라웠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점과 그리하여 자연치료 목적으로 블루마운틴 근처에 이사를 온다는 게 말이다. 자연을 보존하려는 호주의 진심이 느껴졌다. 물론 우리나라도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키려는 노력인지, 보여주기 위한 노력인지 종종 의구심 들기도 한다.
호주를 대표하는 동물은? 캥거루와 코알라다. 블루마운틴 투어 패키지에는 동물원 방문 코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서 캥거루와 코알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사실 나는 동물 보는 것에 그다지 큰 흥미는 없다. 그러므로 '이제 동물원 가는구나, 동물 보겠구나'정도 감흥만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캥거루와 코알라가 너무 귀엽고 신기했다. 그중 내 마음을 쏙 빼앗은 동물은 코알라였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 잎사귀만 먹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더 많이 사진 찍고 눈에 담아두려 했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게으른 성격도 귀여워 보였다. 이래서 귀여운 건 답도 없다고 하는 건가.
시드니 여행을 다녀온 지 8개월이 지났다. 그때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던 추억들은 일상 속에서도 종종 마주친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엔 블루마운틴 투어날이 떠오른다. 옷장 한편에 고이 접어둔 수영복을 발견할 때마다 본다이비치에서 내 모습이 생각난다. 정확히 말하면 낯선 곳에서 냈던 새로운 용기를 마주하는 것이다.
여행은 한정된 기억을 가지고 내 삶을 지속해서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꾸 여행을 떠나나 보다. 그렇다면 얼른 다음 여행지인 멜버른으로 떠나보자.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