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진짜 대충 살 수 있을까?
최근 상하이를 다녀왔다. 19년 지기 친구와 두 번째로 떠나는 해외여행이었다. 가기 전 설레는 마음을 증명하듯 여러 계획을 세웠다. 와이탄을 보며 아침 달리기를 하고 실내 수영장을 이용하기 위해 5성급 호텔을 예약했다. 밤에는 동방명주 야경을 보며 칭다오 생맥주와 고량주를 섞어 중국식 소맥을 타 마실 작정이었다.
출국 당일, 꼼꼼한 친구 덕분에 무사히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중국에서는 처음인 게 많았다. 동파육을 처음 먹어보고 디즈니랜드도 처음 가보았다. 대륙의 스케일을 경험하고 감탄한 채 숙소로 들어왔다. 하루 종일 밖에서 묻은 먼지를 씻어내고자 샤워실에 들어가 옷을 벗었다.
이게 뭐지? 몸에 두드러기가 났는데??
왼쪽 가슴 주변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사실 며칠 전부터 이 부위가 근육통처럼 아팠다. 그저 가슴 운동 후 근성장 중인 내 몸이 열일하고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두드러기까지 나자 걱정이 됐다. 부랴부랴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대상포진'이라는 병을 알게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증상과 너무 비슷했다. 아니, 정확히 일치했지만 1%의 희망은 남겨둔 채 잠을 청했다.
새벽 내내 왼쪽 가슴 주위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한국에 있는 의사 친구에게 내 몸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러자 대상포진이 맞는 것 같으니 빨리 병원에 가라고 했다. 급하게 한국말 응대가 가능한 상하이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멀었다. 더군다나 치료비는 상하이 항공권 비용보다 비쌌다. 이럴 거면 귀국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19년 지기 친구가 귀신같은 정보력으로 찾아낸 한 블로그를 보여줬다. 중국에서 대상포진이 걸려 약사에게 약처방을 받은 게시글이었다. 중국은 의료 분업화가 되어있지 않아서 아직 약국에서도 약사에게 약 처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숙소 근처 약국에 방문했다. '저는 대상포진에 걸렸습니다. 치료하는 약을 모두 주세요.'가 적힌 번역기를 약사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진통제와 함께 발라시클로버(valaciclovir) 약을 처방받았다. 실제로 한국에서 처방하는 항바이러스제였다. 중국에 대한 신뢰(?)가 상승하는 순간이었다.
대상포진은 발병 후 초기 치료가 아주 중요한 질병이다. 여기서 말하는 초기는 발진 후 72시간 이내를 말한다. 처음 걸려본 대상포진이라 골든타임은 놓쳤지만 약사에게 약 처방을 받고 위급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던 건 중국이기에 가능했다.
이후 계획했던 일정을 모두 최소화했다. 아침 달리기, 5성급 호텔 수영장, 칭다오 맥주와 고량주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틈만 나면 휴식을 취했다. 친구는 아픈 내 눈치를 살폈다. 이러려고 온 여행이 아닌데 친구에게 미안했다.
대상포진은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나타난다는데 평소 행동들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준 걸까? 규칙적으로 살려고 했던 강박이 문제였을까? 대상포진에 걸린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대충 살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 몰라. 이제 그런 거 안 할래. 그냥 살래. 마치 대충 얼버무리고 끝내버리는 이 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