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그저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읽게 된 책이다. 파격적이다 못해 도발적이기까지 한 제목인데, 이 제목을 마주하기 전 책을 도끼와 같은 파격의 이미지로 상상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이 파격적인 상상력의 주인공은 이 책을 쓴 박웅현 작가가 아니라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인 프란츠 카프카이다. 다음은 카프카의 문장이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카프카, ‘변신’ , ‘저자의 말’ 중에서
나에게 카프카의 문장을 받아 ‘책은 도끼다’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작가의 영혼에 도끼질을 해준, 그에게 커다란 울림을 가져다 준, 결과적으로 광고인인 그의 직업적 촉수를 갈고 닦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그의 인생의 책들에 대한 나눔’
이 책은 작가가 진행한 강독회의 내용을 글로 엮은 것으로 마치 강연을 듣는 것처럼 술술 편하게 읽힌다. 작가는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소개하고 그 책들로부터 자신이 받았던 울림을 공유한 뒤, ‘여러분도 한 번 읽고 제가 느낀 울림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라며 일독을 권한다. 광고인으로서의 직업적 습관이 자연스럽게 체화된듯 적절히 선택한 단어들은 명료하게 의미 전달을 하는 가운데에도 감성을 촉촉히 자극하고, 내용의 전개는 물 흐르듯 자유롭다. 구어체로 기술된 문장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강연을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명강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작가가 소개하는 책들은 고전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작품과 더불어 그 배경을 이루는 철학, 사상, 정치, 사회에 대한 폭넓은 해설을 덧붙이고 자신이 받았던 울림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내용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작가는 자신의 독서량이 한 달에 서너 권 정도로 많이 읽는 편이 아니지만, 독법에 대해서는 ‘꼭꼭 눌러 읽는다’ 고 표현했다. 그의 표현대로 꼭꼭 눌러 읽는다면 문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 책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 대목을 쓰던 중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글로 적어 정리해보았다. 책은 그저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작가는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깊게’ 읽었다. 작가가 소개한 책의 상당수는 고전으로 작가 외에도 무수히 많은 독자들이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느 독자들과 다른 깊은 울림을 받았고 그 내용을 강연과 책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기까지 하고 있다. 같은 책을 읽고 질적으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결과를 낳고 있다. “책을 그저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읽고 자기 생각과 감성으로 흡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 모두에게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많이 읽는들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내용이 없다면 책 읽는데 들인 시간만 낭비한 것에 다름없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받아들이되, 작가의 생각과 감성을 자신의 생각과 감성과 견주어, 새로운 생각과 감성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 하물며 문학작품이란 단어 하나, 조사 한개, 쉼표 한점, 여백 한켠까지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하나의 세계다. 빨리 읽어 치우려는 깜냥에 속독으로 지나치면 작품 구석구석에 작가가 치밀하게 설계한 구성을 다 놓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작가의 ‘꼭꼭 눌러 읽는다’는 표현은 속독의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물론 방대한 텍스트 속에서 필요한 정보만 뽑아내어 읽는 독법도 있다. 이런 독법은 무언가에 관심이 있어서 처음 정보를 찾을 때, 덜 중요한 정보들 속에서 중요한 정보를 찾아나갈 때 주로 이용한다. 그러나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 빠른 스캔이 끝난 후 텍스트에 집중했을 때에는 그 문맥과 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생각과 견주며 비판적으로 읽어 자기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지식 안에 녹여 넣을 수 있다.
이 책의 세부 내용은 다른 작품들에 대한 소개와 재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내용을 다시 자세히 소개하고 재해석 하는 것은 생산적인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일부 글귀들을 갈무리 해두는 것으로 갈음한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목표로 삼는 건 온몸이 촉수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책을 읽고 나면 촉수가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혹은 없던 촉수가 생겨나는 느낌인데요. 세상의 흐름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내 인생을 온전하게 살고 싶어요. 오늘의 날씨, 해가 뜨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 하나 흘려보내지 않고, 사람과의 만남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면 해요.
유홍준은 고은을 가리켜 “사실주의, 민족주의, 낭만주의가 한 몸으로 육화肉化 되어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가 되고 마는 신묘한 경지의 시인” 이라고 평했습니다. 고은은 “동해는 예술이고 서해는 인생이다”와 같은 표현을 무심하게 툭툭 던져내는, 말이 곧 시인 사람입니다.
급하게 이동하는 중에 전화가 왔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책을 추천하는 책을 만드는데, 한 권 추천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 고사했는데 꼭 좀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뭘 추천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문득 스치는 책이 있어서 얼른 말씀을 드렸죠. ‘안나 카레리나’ 였어요. 왜냐고 묻길래, “젊은 사람들이 읽으면 힘들 때 외롭지 않을 것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인생은 전인미답이에요. 비슷할지언정 어떤 인생도 전인미답이 아닌 게 없어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어떤 상황에 처음 닥쳤을 때 내 감정 상태를 모르거든요. 이게 사랑인가? 질투인가? 미움인가? 정의인가? 잘 몰라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길을 잃지는 않을 거에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된 한 여자를 중심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골목골목 세밀하게 표시된 지도처럼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를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 박웅현, 책은 도끼다’ 중에서
꽃 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 설요
이것은 대책이 없는 생의 충동이다. 그 충동은 위태롭고 무질서하다. 한문학자 손중섭은 이 시에 대해서 “아, 한 젊음을 늙히기에 저리도 힘듦이여!”라고 썼다.
봄이 땅에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
— 김훈 , ‘자전거 여행’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모두 무죄입니다
— 고은, ‘함박눈’
* 일전에 ‘만인보’의 일부를 찾아 읽었던 기억도 있고, 관심이 가서 조금 더 찾아보았다.
[네이버 캐스트] 우리시대의 멘토 :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청춘의 시인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 알베르 카뮈, ‘이방인’ 중에서
저는 이 문장 속에 궁극적으로 카뮈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뫼르소의 말 속에 죽은 사람처럼 살지 말고 현재를 살라는, 찬란히 부서지는 지중해의 햇살을 맞이하듯 그렇게 순간을 소중하게 살라는 외침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그리고 과연, 지중해이고 카뮈다 싶습니다.
— 박웅현, ‘책은 도끼다’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중에서
침묵의 위대함은 앞뒤의 음향이 만든다. 그림 속 여백의 의미심장함은 주위의 형상이 조성한다.
— 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중에서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법정,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