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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May 05. 2017

홍준표의 '강성귀족노조론'

19대 대선토론 관전평


요즘 논리적인 주장을 담은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다. 생각 한개를 할 때에도 올바른 논리로 표현하고, 정확하고 효율적인 문장에 담으려 노력 중이다. 이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면 모든 현상을 해부해서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긴다. 내게 깃든 이 습관은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후보자 토론회에서 재미있는 재료를 하나 포착해냈다.


2017년 5월 9일, 대한민국은 19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치른다. 이를 11일 앞둔 4월 28일,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 2차 대선후보 토론회가 열렸다. 내가 이 글에서 다루는 주제는 토론회에서 인상 깊게 본 대목으로, 그때는 이렇게 글로 정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숙취와 함께 해변을 산책하던 중 이 글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 첫번째 이유이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한 것은 두번째 이유이다.

 

내가 관심을 가진 대목은 '강성귀족노조 논쟁' 이다. 홍준표 후보는 '강성귀족노조'가 현재 한국이 직면한 경제 위기와 양극화의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홍준표의 경제, 사회 문제 인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홍준표 캠프의 선거 전략이 대단히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가능성 있는 표밭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치적인 견해를 쉽게 바꾸지 않는다. 자신과 결이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에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설득하는 작업은 정확한 사실과 논리, 몇 차례의 토론, 진정성 어린 호소, 많은 사람들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앞서의 요건들에 더해 충분한 시간이라는 요건까지 충족되어야, 가뭄에 콩나듯 여당 지지자가 야당 지지자로 전향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홍준표가 대선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3월 18일로, 대선으로부터 51일 전이었다. 51일은 문재인의 표를 뺏어올 수 있는 시간으로 충분하지 않다.  


홍준표에게 표를 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전통적인 여당 지지층이다. 50대 이상, 경상도.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홍준표를 지지하고 있으나 일부는 이탈해서 안철수와 유승민에게 가 있다. 그러므로 홍준표가 달성해야 하는 목표는 '박근혜 탄핵 후 이탈한 새누리당의 표를 51일 안에 되찾아 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홍준표는 강성귀족노조를 경제 위기와 경제 양극화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발언권을 얻을 때마다 도마에 올려 사정없이 비판한다. 빈약한 논리로 막무가내로 우기는 모습을 두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홍준표의 행동이 상당히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80년대까지 집권한 군부정권까지, 한국의 공권력은 노조를 일관되게 탄압해왔다. 공권력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언론은 노조를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해왔다. 사람은 일관된 주장에 오래도록 노출될 때 그 주장의 진위와 관계없이 내용을 참이라고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홍준표가 되찾아와야 하는 50대 이상 유권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집권기간에 삶의 대부분을 살아왔다. 그들은 언론이 생산해온 노조에 대한 부정적 메시지에 오랜 기간 노출되어 왔다. 언론이 생산했던 메시지의 진위와 관계없이, 50대 이상 유권자는 노조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을 여지가 많다. 일부 노조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켜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말하는 홍준표 후보의 모습은 50대 이상 유권자의 눈에 진실되고 강직한 모습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 강성귀족노조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상당히 전략적이고 효율적이다. 강성이라는 수식어는 '거칠고 과격하다'는 의미로, 노조가 법의 제한선을 수시로 넘는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귀족이라는 수식어는 일부 노조가 사측에 지나치게 많은 혜택을 요구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저 강성귀족노조라는 단어를 말하는 자체만으로 한국 노조들의 준법의식과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전략적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효과를 노조라는 단어에 단 두개의 수식어만을 추가하여 총 여섯 글자 단어 한개로 표현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가.  


이 전략적이고 효율적인 단어는 한국 대중이 노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편한 심경을 정확하게 공략한다. 기아차 노조는 최근 4월 27일과 28일에 실시한 조합원 투표를 통해, 비정규직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는 규약 개정안을 71.7%의 찬성률로 가결시켰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을 버린 기아차 노조의 행태에 대해, 진보진영에서조차 한 목소리로 강하게 비판했다. 이 사건은 상징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지만, 이러한 일이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용세습, 비정규직 차별 등과 같은 노조 내부의 모순은 이미 오래 전부터 노조 안팎의 지적을 받아왔다. 헌법이 보장한 노조의 권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일지라도 일부 노조의 지나친 특혜, 공정하지 못한 행태에는 공분을 느낀다. 홍준표 후보의 강성귀족노조라는 단어 한 마디는 정규직 노조에 소속되지 않은 대다수 노동자의 분노까지 대변하므로, 여당의 전통적 지지층이 아닌 사람들의 표심까지 덤으로 공략하는 효과가 있다. 홍준표가 강성귀족노조를 많이 언급하는 데에는 충분한 전략적 이유와 실익이 있다.


홍준표는 강성귀족노조를 비판함으로써 전략적 효과를 톡톡히 누리지만 그 대가로 논리적 오류를 감수해야 한다. 경제 위기, 일자리 문제 등 주요 논점의 원인과 해법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강성귀족노조 하나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리 간단치 않다. 단적인 예로 경제위기와 일자리 문제 모두 세계경제의 동반침체와 불확실성이라는 본질적 원인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이런 원인들을 쏙 빼놓고 강성귀족노조 하나만을 줄기차게 얘기하는 탓에 홍준표의 언설은 논리적으로 헛점이 많다. 문재인을 포함한 다른 후보들은 홍준표의 주장을 논박해서 그가 '강성귀족노조론'을 남용해 얻는 이득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내가 토론에서 흥미를 느낀 대목은 '강성귀족노조론'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반론이었다. 문재인은 상대에게 질문을 던지고 상대가 그 질문에 대답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다. 삼성전자의 예를 들며, '삼성전자는 노조가 없는데 해외사업장에서 많은 인력을 채용했다. 기업들이 노조 때문에 국내에서 채용을 안해서 국내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주장은 앞뒤가 안 맞는다'고 말했다. 홍준표는 이에 대해 '노조가 없었기 때문에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동문서답을 했다. 문재인은 또 '해운, 조선업계가 맞이한 심각한 위기가 강성귀족노조 때문'이냐고 물었다. 홍준표는 '전세계적으로 업계가 침체되었고, 무리하게 저가 수주를 한 탓이다. 강성귀족노조 때문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홍준표는 첫번째 질문에서 빠져나가는데에 성공했지만, 두번째 질문의 대답에서 부분적으로 '강성귀족노조론'의 오류를 인정해야 했다. 문재인의 논박은 부분적으로 성공했으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토론회 자료 링크]

 

상대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방법, 논증의 기술은 여러가지다. 문재인은 여유있는 모습과 차분한 어조로 홍준표에게 질문을 했고, 홍준표의 논리가 품고 있는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문답을 통해 상대 스스로 자기 주장의 오류를 말하게 하는 방법은 소크라테스가 즐겨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과거 진보진영 정치인 중 많은 사람이 논증의 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주장을 조목조목 짚어 논파하는 것이 항상 능사는 아니다. 지난 18대 대선 당시를 예로 들어보자. 18대 대선 토론회에서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비판하던 장면은 많은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이정희는 박근혜의 선친 박정희에 대해 '독재자', '다카키 마사오'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며 도덕성을 공격했다. 박근혜는 이정희의 논리를 효과적으로 논박하지 못했다. 사실 이정희가 마음먹고 박근혜를 공격할 경우, 박근혜가 당해내지 못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결과였다. 이정희에 비해 박근혜는 논리적으로 말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논리의 대결만 놓고 봤을 때, 박근혜는 이정희나 문재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18대 대선은 박근혜의 승리, 이정희와 문재인을 비롯한 야권의 패배로 끝났다. 나는 부분적인 이유를, 당시 토론에서 이정희가 논증의 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데에서 찾는다. 사람은 듣기 싫은 얘기 앞에서 귀를 닫는다. 논리적으로 참이고 도덕적으로 옳으며 경험적으로 증명된 사실에 기반한 주장일지라 해도, 사람은 듣기 싫으면 귀를 닫는다. 정치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원인과 결과를 다룬다. 정치적 견해를 설득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설득해 조금이라도 좋아하게 만드는 일이니 얼마나 어려운가. 그 설득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듣기 싫은 얘기를 할 때 전략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토론장에서 이정희가 말하고 있던 상대는 박근혜가 아니라 방송을 지켜보고 있던 유권자였다. 이정희는 상대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수 유권자의 분노와 결집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문재인은 상대를 존중하는 가운데 상대의 입으로 자신의 모순을 인정하게 했다. 물론 홍준표는 자신이 논박당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토론을 지켜보던 유권자 중 일부는 홍준표의 주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다. 유권자의 정치적 견해를 설득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작업이다. 정확한 사실과 논리, 수차례의 토론, 진정성 어린 호소,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설득하고자 하는 대상의 마음 속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의심해 볼 실마리를 심어줬다면,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이다. 토론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과로는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4월 28일의 토론 이후에도 홍준표는 강성귀족노조론을 줄기차게 얘기하고 있다. 문재인의 논박, 심상정의 더 근본적인 논박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전략을 수정할 이유는 없다. 이기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강성귀족노조론은 매우 전략적이고 효과적인 무기이므로 대선 직전까지 줄기차게 써먹을 것이다. (* 심상정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을 근거로 홍준표의 노조비판 태도를 공격했다)


한편 기아차 비정규직 노조 분리 사태는 우리 사회에 무거운 숙제를 던져준다. 홍준표의 강성귀족노조론은 대선 이후에도 진지하게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념적으로 순수했던 사회주의가 몰락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수 권력집단이 권력을 독점하고 교조화되었기 때문이다. 기아차 정규직 노조가 보여준 행태는 그들 스스로 노동자의 수평적 관계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의 몰락을 불러온 권력집단의 행동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한다.

 

대선 이후 이 주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이어간다면,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헌법이 명시하는 노동권의 존엄한 가치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이상을 현실사회에 구현하는 방법은 정교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부의 노동자는 여전히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암담한 처지에 놓여있는 반면, 한편으로는 강성귀족노조론이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을 정도로 노조 내부의 문제점 또한 많다. 이 얼마나 모순된 현실인가. 직업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과감하게 논의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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