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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Mar 01. 2024

세 대의 카메라, 4일의 밴쿠버 #1

Day-1





"7시 15분 밴쿠버행 승객분들은 기내에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간부터 푸르스름한 빛이 돌 때까지 비어있던 자리에 앉아서 봉투에 담긴 초콜릿 쿠키를 거의 다 해치워가자 바로 옆 게이트에서 안내방송이 들렸다. 나를 보면서 '쿠키 몬스터'라고 놀려대던 한국계 친구 D, 그런 둘보다 약간은 연장자였던 장신의 중국계 친구 A, 그렇게 세 명은 각자의 백팩을 몸에 두르고 점점 줄어들어 가던 라인 뒤쪽으로 몸을 옮겼다.



이 4일간의 일상 속 일탈은 2주 전 급작스럽게 계획됐다. 대부분의 정보들을 얻는 것에 있어 빠릿빠릿하게 반응했던 D 가 그룹 채팅방에 한 URL 링크를 공유한 것이 시작이었다. 비수기 시즌이었던 밴쿠버 호텔 딜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었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확인을 했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거 진짜 말도 안 되는 가격이야!"라고 격정을 내기도 했던 그였지만 각자 생업에 종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던 터라 그들에게는 이런 의견 피력마저도 그저 스크롤 상위로 올라가는 하나의 문장에 불과했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모든 일정을 잘 마치고 돌아와 '성공적인 여행'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이지만, 저 당시 나의 기분 또한 짧은 여행을 떠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1년 간의 캐나다 캘거리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약 한 달 여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개인적인 일들과 자잘한 서류정리가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던 게 그 이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쇼트 트립을 떠날 때마다 가장 두렵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이런 이유 때문에 본인은 아직도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 기준에서 '좋은 사진'을 기록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걸림돌들이 있었음에도 어떻게 떠나게 됐느냐? 물론 물 같은 내 성격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항공권 예매를 3일 앞두고 따로 날라 온 A의 메시지 하나가 결론적으로 나의 마음을 완전히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는 워낙 말이 없어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싶었는데, 여러 번 만나다 보니 은근히 케미가 잘 맞았던 걸 서로 깨닫게 된 이후로는 스스럼없이 지냈던 그런 사이였다. 평소에도 워낙 부탁이나 어떤 일을 실행하는 데 있어 같이 잘 움직이지 않았던 그가 이런 문자를 따로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위에 서술한 같잖은 연유들을 제외하고서라도 다시금 훌쩍 떠나갈 용기를 얻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분명했다.




"D는 혼자서라도 갈 기세라 이제 우리 판단만 남은 것 같은데, 네가 간다고 하면 나도 같이 따라갈게. 솔직히 얼마 안 있으면 우리는 영영 다시 못 볼 수도 있잖아?"




세 남자 모두 각기 다른 좌석에 앉아서 자칫 1시간 여의 비행이 지루할 법도 했지만, 다행히도 나의 좌측에 앉아있던 한 인도인 중년 아저씨가 말을 걸어와 체감상 실제 시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갔다. 눈썰미가 원래부터 좋으셨던 분이었는지 나를 보자마자 다른 아시아 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왔냐고 물음을 던졌을 때는 약간 소름이 돋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의 눈 모양이 유독 다르게 생긴 특징을 캐치했다고 말했는데, 정말 웃긴 사실은 캘거리에서 지나가다 만나는 열에 여덟 사람들은(명동 거리를 거닐 때에도 똑같은 확률이었다.) 나를 일본인으로 알아봤다는 것이다. 4일 동안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을 끝으로 나는 기내에서 빠져나와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 틈에 잠깐 유리창 밖으로 날씨를 확인했다. 비가 많이, 그리고 자주 오는 곳이라는 것을 수많은 친구들에 증언에 의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굵고 많은 빗줄기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Drizzling' 혹은 'Shower' 정도의 양이 올 것이라 생각했던 세 사람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채로 'Rain'이라는 단어에 더 가까운 날씨가 그들을 환영했다. 이곳이 마치 'Raincouver'라는 것을 굳이 티 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캘거리와 1시간의 시차가 발생했던 덕분에 우리는 다시 오후 7시를 맞이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던 터라 몸속 곳간은 30% 정도만 비어져 있었고, 이 도시는 넘어왔던 곳과는 다르게 새벽까지 문을 여는 식당들이나 카페가 많았기에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우선 공항에서 바로 연결된 열차를 타고 다운타운 안쪽에 위치해 있던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서 큰 번화가 중 한 곳인 Granville Street를 구경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짐을 던져놓고 다시 건물 밖으로 나올 때 내 손에는 혹시나 해서 챙겨 온 작은 우산이 있었지만, 두 친구의 왼손은 휑하게 비어져 있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호텔 프런트에서 주저하고 있던 세 남자를 보고는 간이 우산을 빌려주어서 우리는 별다른 문제없이 한 손에는 카메라, 다른 한 손에는 우산 손잡이를 잡은 채로 추적추적 소리를 내며 토요일 밤의 빛과 사람들을 마주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번화가의 시작 지점에 도착해 새로운 장면들을 목도했지만 내 심장은 그렇게까지 뛰지 않았다. 비 맞는 것을 끔찍이 싫어해서 단순히 걷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고, 한 손만을 사용해서 카메라를 조작하는 것 또한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조건들 속에 있다 보니 당연하게도 형식적인 구도와 사진을 찍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대감을 크게 가지고 떠나지 않았던 여행이라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이 날 느껴지지 않았다. 세 남자 중 유일하게 이곳에 처음 방문한 사람이었는데 가장 시큰둥했던 걸 돌이켜보면 친구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까지 드는 게 지금 심정이다. 여기 사람들은 이 정도 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는지 빽빽하게 거리를 메우고 있었고, 우리는 그들을 피해 가며 각자의 방식으로 사진을 찍었다. 가지고 왔던 렌즈의 화각이 다 달라서 같이 붙어 다녀도 얼마 안 가 뿔뿔이 흩어지는 게 일쑤였지만.



1시간이 약간 안 되어 우리는 자그마한 호텔의 네온사인을 끝으로 첫날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끼니를 해결할 장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여러 옵션들이 있었지만 D 가 그토록이나 노래를 불렀던 일본 스타일이 섞인 미국식 핫도그 집으로 결정을 하고 곧바로 그곳으로 이동했다. 핫도그보다 타코야끼가 무척이나 그리웠던 나 또한 이때부터 조금 기분이 나아졌던 것 같다. 가게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 각자 주문을 한 뒤에 다 같이 풀어헤쳐 맛을 봤는데, 한창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저렴한 가격에 비해 맛은 상당히 고급지게 느껴졌다. 내가 첫 번째 타코야끼를 입에 넣고 과장 없는 '찐' 리액션을 보이자 흐뭇해하던 D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실내는 밤 10시까지만 운영을 한다고 해서 남은 음식들을 부리나케 들고나가 추위에 떨며 마무리했지만, 바닷가 근처에서 소주 한 잔 하는 것 마냥 입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입김과 함께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기와 달리는 차량들을 보는 것은 메트로폴리탄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운치 있는 광경 중 하나였다.



분명 상당한 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D의 위장은 아직 부족하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호텔로 돌아가는 경로 중간에 24시간 운영하는 베이커리 카페가 있었고, 그가 잠시 이곳에서 생활을 할 때 자주 들렀던 곳이었기에 음식에 대한 퀄리티 걱정 없이 2차를 이어갈 수 있었다. 너네는 어떻게 아직도 배가 고프냐며 외계인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A였지만 가게에 들어선 직후에는 그도 약간 아쉬웠는지 딸기 스무디를 한 손에 들고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큼지막한 도넛들과 함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털어내면서 "이게 밴쿠버지!"라는 말과 함께 다음 날 일정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을 준비할 때까지 아무도 몰랐었지만 알고 보니 이 주가 설날, 즉 Lunar's New year가 끼어있었고, 나름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던 밴쿠버의 차이나타운에서 이벤트가 있다는 D의 말에 그곳에서 하루를 시작하자고 모두 합을 맞췄다. 캘거리에서는 우리가 떠나는 날 행사가 있어 아쉽게 보지 못했었는데, 이곳에서 이렇게 보상을 받는 듯 싶었다. 그러나 다음날 밤까지 계속해서 비 소식이 있어 걸리적거리는 우산을 하루 더 휴대해야 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처럼 안고 가야만 했다. 이 이후에도 시답잖은 이야기와 함께 다른 정보들을 찾아보다 보니 시간은 자정을 약간 넘어갔고,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호텔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카메라 배터리를 분리해 충전기에 꽂아 넣은 뒤 각자의 침대에 다이빙한 나와 D (*A는 하루 일찍 돌아갈 예정이어서 다른 호텔에 방을 잡았다.)는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뒤적거렸다. 볼거리가 더 있나 검색하고 있던 것도 잠시, 눈이 저절로 감기는 걸 인지하자마자 이불을 끌어올린 나를 보던 D도 피곤했는지 같은 행동을 취하며 잠에 들 준비를 했다. 바닥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 충전 케이블을 침대로 끌어올리고 있던 중, 그는 갑자기 나에게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야. 여기 5층에 온탕 하고 야외 풀장 있는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갈래?"



"몇 시부터 여는데?"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어차피 차이나타운은 별로 안 머니까 난 먼저 몸 좀 지지고 갈까 해서."



"내가 알람 맞출게. 8시면 충분하겠지?"



"충분하고도 남지. 불 끈다. 첫날 고생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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