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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엽 Sep 11. 2019

내 친구의 책, 쪽지종례

책을 통해 다시 만난 친구, 그가 말해준 진짜 어른에 대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에게 가장 친한 사람은 나의 현재를 함께 보내는 사람들이다. 현재의 내 고민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기에... 고등학교 시절에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가장 친한 사람이고, 대학교 시절에는 그 친구들이, 사회생활은 하는 지금은 내 회사 동료들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가장 가까운 시절을 함께 보낸 이후  친구들이 함께할 시간과 장소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내 마음 한편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안 친해지고 껄끄러운 사이가 된다기보다는, 그 친구들이 지금 어떠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서 친구의 ‘현재’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잠시 멀어졌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다시 만나면 새삼 낯설게 느껴지곤 한다. 나에게는 마냥 바보 같아 보이는 초등학교 동창이 버젓하게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사업을 기획하고, 수십억 원의 딜(Deal)을 영업하고, 세계에서 꼽히는 고도의 기술을 개발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가 함께 하지 않은 시간, 내가 보지 못한 시간 속에서 친구들은 치열하게 고민했고 노력했고 전문성을 쌓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시간들을 함께 하지 못 했기에 내 머릿속의 그들은 그저 수십 년 전에 농담 따먹기나 하던 고등학생일 뿐이다. 훌쩍 커버린, 아니 이제는, 커버렸다고 하는 표현을 쓰기에도 어색한 나이가 되어 버린 친구들의 현재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날에 새삼 그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하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한다.



 고등학교 동창인 내 친구 이경준의 책 ‘쪽지종례’를 보게 된 내 마음이 그러하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 친구는 생각이 깊었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철부지처럼 장난을 쳐대는 나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을 보면서 가끔씩 흐뭇한 미소를 짓긴 하였으나, 한 번도 같이 찍고 까부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던 친구였다. 대학생활을 만끽하며 친구와 술을 좇던 나에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한껏 과장된 꿈에 부풀었던 나에게 그 친구는 답답해 보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의 꿈이자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은 시인이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고, 경제학과를 나온 자본주의의 첨병인 나에게 그 꿈은 세상 물정 모르는 답답하고 허황된 꿈이었다. 꿈을 잠시 접어두고 국어 교사가 되겠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임용고시를 몇 년이나 준비하는 모습은 나에게 걱정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고생 끝에 그는 국어교사가 되었고 시인으로 등단을 하였다. 가끔 친구의 시를 카톡으로 접하기도 하였고 친구의 블로그를 곁눈질하기도 하였으나, 감성으로 가득 찬 녀석의 작품들은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인 내 눈에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외계어와 같았다. (사실 지금도 그러하다) 이번 책 ‘쪽지종례’가  출판된다는 소식에 얼른 예약 주문을 하긴 하였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쉬이 손이 가지 않던 친구의 책을 지난 7월 베트남 여행길에 읽게 되었다. 내가 보지 못 했던 시간 동안 녀석이 착실하게 쌓아온 깊이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일상생활을 관찰하고 찰나의 감정과 깨달음을 포착해내는 작가로서의 날카로운 감성, 포착된 순간을 묵직한 깊이로 들여다볼 수 있는 사유의 힘, 본인의 깊이감을 독자들에게 적절한 리듬감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글솜씨. 친구의 책이 아니라 모 작가의 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좋았다’라고 기억될만한 멋진 작품이 내 친구의 손에서 탄생하였다. 내가 모르고 흘려보냈던 친구의 고민과 깊이, 성찰과 노력의 시간들을 친구의 모습이 아니라 책을 통해 보게 되는 기분이었다. 또한 그 관찰을 통해 ‘친구’라는 말에 묻혀서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진짜 그 녀석에 대해, 녀석의 현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경준이가 중학교 3학년 담임을 하던 1년간, 그리고 이듬해 고등학교로 옮긴 이후 다시 담임을 하던 1년간, 총 2년 동안 매주 금요일의 종례를 짧은 글을 적어서 대신하였다고 한다. 그 글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 ‘쪽지종례’이다. 친구 녀석이 선생님으로서 어떻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장시키고자 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글이다. 

친구의 책이기에 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감정은 ‘아름답다’라는 것이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마음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흔히 우리 머릿속에 있는, 아이들의 모든 것을 보듬어주고 포용해주는 ‘사랑’으로 가득한 스승의 모습을 친구에게서 발견했다면 나는 오히려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내가 좋았던 점은 ‘존중’의 가치로 학생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었다. 아이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어른의 잣대로 재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어른 마음대로 강요하지 않고 그냥 그 모습 그대로, 각각의 가능성 그대로 바라본다는 점이었다. 

 아마 내 지식의 폭과 생각의 깊이가 모자란 탓이겠지만, 나이가 들고 경험이 점점 쌓이면서 오히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부분이 정말 많구나’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해지지 못 해고 내가 아는 작은 지식들을 뽐내거나 짧은 지식에 근거하여 무언가를 판단해 버리곤 한다. 사실은 무언지도 잘 모르면서 소화할 수 없는 큰 일들에 평가 내리고 손가락질하고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내 스스로의 역량과 생각이 성장해나가는 속도보다, 개인의 삶이나 사회생활에서 주어지는 책임의 크기가 커나가는 속도가 더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모른다고 배워야 된다고 말했다면, 커져버린 책임과 체면에 눌려 잘 아는 척, 결단력이 있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를 들면 ‘요즘 경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사실 내가 경제학과를 나왔고 나름 10년 차 직장인으로서 경제의 한 귀퉁이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나는 경제에 대해서 잘 모른다. 정확히 어떤 사유로 인해 경제가 어려운 것인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일부 뉴스의 헤드라인 정도 읽는 수준의 노력을 기하고 있고, 읽어도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나와 크게 이해의 수준이 다르지 않을 텐데, 나라 경제가 엉망이라는 둥,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둥, 누가 잘못을 했다는 둥,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어떻다는 둥 하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흔한 이야깃거리로 씹어대곤 한다. 사실은 잘 모르면서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속내와 고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가족, 친구와 같은 끈끈한 유대감으로 뭉쳐있지만, 사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고민들로 일상을 채워나가고 있는지, 그런 일상들이 모여서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 잘 모른다. 가장 친한 친구인 경준이가 고등학교를 벗어나서 십수 년의 세월 동안 이루어낸 고민의 결과물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책에서 발견해내는 내 모습처럼 말이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잘 모름에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재단해버린다.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이렇게 살아야 성공해’, ‘걔는 별로야’라는 말을 우리는 일상처럼 하고 있다. 사실 내 인생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성공의 방정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 방정식을 내가 알고 있다고 해도 내 인생에조차 적용 못하여 내 인생도 고단한 것이 99%의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성공과 행복을 가르치려고 든다. 심지어 그 사람이 생각하는 성공과 행복이 어떤 모습일지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말이다.

 친구의 책에서 좋았던 점이 그 부분이다. 수능점수 몇 점이 너희들 인생의 점수는 아니라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물론 친구 녀석 또한 어쩔 수 없는 꼰대이고, 선생이기에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들 하나하나의 인생을 그저 그 모습대로 존중하고자 한다. 함부로 평가해버리고 고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니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희는 어떠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너희들도 스스로 사유하고 인생을 일구어나가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그런 어른이 된 이후에 누군가의 다른 인생과 생각도 존중할 줄 아는 ‘어른’이 되라고 말한다. 진짜 어른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 박동훈이 문득 생각난다. 이지은 배우(아이유)가 연기한 또 다른 주인공 이지안이 처음으로 만난 제대로 된 어른이 박동훈이다. 처음 캐스팅과 시놉시스를 보고 로리타 논란도 있었으나, 둘 사이의 감정은 일반적인 남녀 간의 사랑과 감정과는 다르다. 단 한 번도 존중받고 배려받지 못하고 자라와서, 세상을 향해 적대심만 보이던 아이가 진짜 어른을 만나서 스스로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의 이야기이다. 진짜 어른의 세계는 멋지지도 않고 고민이 해결되지도 부유하지도 않지만, 서로가 부족함을 이해해주고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세계이다. 단순히 극 중 이지안(이지은 배우)이 성장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지안과의 만감과 그 성장을 통해서 박동훈 또한 위로받고 더 큰 어른이 되어 간다. 나이를 몇 살 더 먹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알고 세상이 넓은 줄 알기에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진짜 어른 말이다. 책을 통해서 다시 만난 내 친구 경준이는 그런 어른이 되어 있었고, 그런 어른을 키워내려 하고 있었다.




 가끔 이렇게 훌쩍 커버린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멋진 그들의 고민에 비하면 내 고민들은 너무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걸어온 전문분야에 비해 내가 할 수 있는 내 분야는 보잘것없어 보이고, 내가 쌓아온 시간들은 시간 낭비 같아 보이기도 한다. 

 훌쩍 커버린 내 친구가 나를 보아도 그렇게 느낄까? 맨날 술만 마시고 생각 없이 헤헤거리는 사람으로 보일까? 처음 들어보는 조그만 스타트업에서 사업 놀이를 하고 있는 속물적인 사람으로 보일까? 

 아마 그렇진 않을 것이다. 

 스스로 돌이켜보면 보잘것없는 것들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떳떳하게 내 길을 걸어왔으니까…. 내 친구가 멋진 어른으로 성장했던 것처럼 나 역시도 나름대로는 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누군가의 방식과 조금은 다를 수 있고, 결과의 크기가 미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나름의 열매를 맺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설령 그렇지 못했어도 어떠하랴? 성장이라는 것이, 성공이라는 것이 제3자의 판단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라는 것이 결국 ‘쪽지종례’를 통해서 친구가 아이들에게 해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던가?

 멋진 친구가 알려준 멋진 가르침을 빌어 부끄러워지려 하는 나 자신에 좀 더 떳떳해지고자 한다. 멋지게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와는 다르지만 또 멋지게 인생을 살아내며 내가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준 친구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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