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의 유산, 6번의 도전으로 쌍둥이를 만난 과정, 네 번째 이야기
단언컨대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모두 정당하고 당연했다. 내 얘길 듣고 누군가 그건 좀 오버다라고 말한다면 지금이라도 난 그 사람을 한 대 칠 수 있다.
두 번의 유산을 경험한 후 인공수정을 두 번 더 시도했고 모두 실패했다. 네 번째 시도 땐 아이는 생겼으나 살지도 죽지도 않는 애매한 배아 상태로 스스로 나가떨어지는 주사를 맞으며 없애야 했다. 세상도 참 잔인하지.
이 정도 되니 내겐 단순한 슬픔 이상의 인생이 바뀌는 변화들이 생겼다. 겉모습은 건강해 보였으나 속은 썩어 문드러진 음식물쓰레기 같았다. 먼저 세상 모든 것들이 싫어지는데 그중 세 가지에 유난히 분노가 차오른다.
첫 번째, 음식. 유산 후 몸을 돌보는 건 임신 때만큼이나 중요한데 나만 그런가? 세상 모든 음식이 싫어진다. 착상에 좋다는 미꾸라지탕, 아보카도, 소고기 등 잔뜩 먹었는데도 실패하니 잘 챙겨 먹어야지란 생각보다 나 까짓게 먹어 뭐하나, 그래 봤자 아이도 품지 못하는 몸인데 싶다. 카페인 잔뜩 넣어 심장이 아플듯한 커피, 어디까지 기억나나 싶을 정도의 음주. 속이 터질듯한 매운 음식들만 생각난다.
두 번째, 사람. 나를 위한다며 무참히 내뱉는 위로의 말들이 칼날같이 느껴진다. 지나가는 택배기사를 보고 오늘 오기로 한 택배가 생각나 ‘104동 203호에 온 택배 있을까요?’ 말을 거니 아저씨는 뭐가 불편했는지 퉁명스럽게 받아친다. ‘집에 가서 기다리세요!’...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미친 듯이 서럽다. 세상에게 펀치 맞은 것 기분에 잘 붙들고 있던 ‘괜찮아’란 끈을 스스로 놓아버린다.
통화 한번 한 적 없던 이모에게 전화가 와서 받으니 첫마디가 이렇다. ‘불임 때문에 많이 힘들지?! 이모가 힘내라고 전화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시절의 난 화를 참을 수 없어 전화기 너머로 소리쳤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한 마디씩 건넸다. ‘그러니까 아이를 일찍 낳아야 살기 편해요.’, ‘세상에 유산하는 여성들 많으니까 너만 힘들다 생각하지 마.’ , ‘나도 그런 경험 있었어. 나는 말이야...’
도대체 누구를 위한 위로인가? 스스로를 상처 속에 가둔 나를 위함인가, 아니면 그런 나를 바라보는 자신의 불편함에 대한 위로인가? 제발 부탁인데 힘든 사람이 먼저 꺼내지 않는 주제에 대해 애써 위로한다며 말 꺼내지 마라.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한 말이니 좋게 생각하라는 의견엔 그건 그들 사정이니 힘든 내가 애써 그들 마음까지 돌볼 필요는 없다 말하고 싶으니까. 그땐 그랬다. 타인을 향한 그 어떤 이해나 배려도 내겐 불가능했다.
세 번째. 나 자신. 애처롭고 안쓰러운데 한심하고 무능력한 거울 속의 내 모습.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마치 일 못하는 회사원이 인정받기 위해 아등바등 피. 땀 흘리며 출근하는 것 같았다. 괜히 연하 남자와 결혼했나? 나로 인해 삼대 종손의 혈육이 끊기면 어쩌지? 시부모님을 볼 때마다 죄인이 된 듯한 기분에 눈을 똑바로 마주치기 힘들어하며 동시에 그런 나를 또 한 번 채찍질한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왜 혼자 눈치를 만들어?’ 죄책감과 자기 합리화 사이에 진짜 내가 서 있을 곳은 없었다.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도 불필요한 생각이었다. 세상을 살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가치’라는 의미가 내 인생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도전하고 싶지 않다 생각들 때 남편이 투자사기를 당했고 임신이란 압박에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당분간 돈 버는 일에 집중해야지. 지금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 그렇게 2년간 일에 빠져 바쁜 일상을 보냈다. 물론 의학 기술을 찾지 않은 것뿐이지 매달 한 번도 빠짐없이 배란일에 최선을 다했고 임테기의 한 줄을 확인해야 했다. 화장실에서 울다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아이를 갖고 싶니? 아이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몇 년을 끝없이 스스로에게 물은 이 질문에 내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모든 걸 잃어도 내 아이를 만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