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이것은 물이다

David Foster Wallace의 "This is water"

by seurat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는 미국의 소설가이자 교수다. 영미권에서는 꽤 유명한 작가다. 그는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고 창조적인 작가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는다. 다수의 저작이 있으며, 다수의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1996년 작품 <한없는 웃음거리> (Infinite Jest)가 대표작이다. 이 책은 타임지가 선정한 '1923년부터 2005년까지의 영어 소설 100선'에 뽑혔다.


그가 2005년 케니언 대학(Kenyon College)에서 한 졸업식 축사는 <이것은 물이다> (This is water)라는 책이 되었다. 이 축사는 그가 한 처음이자 마지막 축사였다.




<이것은 물이다> 김재희 옮김. 나무생각 출판. 2012











일상에 얽매인 무의식적인 생활을 어떻게 하면 그만둘 수 있을까?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우리들의 머릿속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철학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지극히 간단하지만 심오한 질문들이다. 이 짧은 강연은 인생과 인간 본성에 관해 놀랍도록 예리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인간 본성의 근원을 파헤쳐 우리의 삶을 바라보고,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






그는 강연 도입부에 짧지만 강력한 이야기 하나를 던진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와 마주친다. 그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넨다.
"잘 있었니 얘들아? 물이 괜찮니?"
어린 물고기 두 마리는 잠깐 동안 말없이 헤엄치다, 물고기 한 마리가 옆의 물고기를 바라보며 말한다.
"도대체 물이란 게 뭐야?"




이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는 당연하고 중요한 현실이 사실은 가장 보기 힘들고 논하기 어렵다는 논점을 전한다. 꽤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날마다 겪어야 하는 인생의 최전전에서 진부하고 상투적인 것이야말로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일지 모른다. (15p)


그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주제 선택에 관한 것"이 학교 교육의 주요 목적이라는 인문학적 클리셰에 동의한다. (20p)


그가 생각하는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인문학의 진언(眞言)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조금은 덜 교만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확신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약간은 소유하는 것.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실제로 완전히 잘못 알고 있거나 착각하고 있는 사실들을 무의식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39-40p)


우리는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느끼며 살아간다. 내가 하는 모든 체험의 절대적 중심은 '나 자신'이다. 내 생각과 감정은 직접 일어나는 일이고, 절박하며, 실존하는 현실이다. (45p)


이때, 우리는 선택의 문제를 마주한다. 우리의 태생적 '디폴트 세팅'(default setting)을 조절(adjust)하는 능력을 갖추는 문제다. '잘 적응한'(well-adjusted) 사람은 정신적,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51p)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의 진정한 의미다.


다시 말해, 정신을 차리고 확실한 의식을 가져 자신이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대상을 선택하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의미를 구성할 방법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다는 뜻이다.(60p) 그는 어른이 되어 이런 종류의 선택을 하지 않거나 할 줄 모른다면 인생이 엉망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61p)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대학 교육, 즉 인문학 교육의 진가다. 성인으로서의 삶을 그저 편안하고 순조롭게, 그럴싸한 모습으로 '죽은 삶'을 살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것.


무의식적인 일상의 계속이 아닌 삶을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


자기 머리의 노예가 되지 않고, 허구헌 날 독불장군처럼 유일무이하며 완벽하게 혼자 고고하게 존재하는 태생적인 디폴트세팅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 (67p)




이 '허구헌 날'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어른의 삶'을 이야기할 때, 특히 졸업 연설에서 자주 언급되지 않는 큰 부분이 있다. 바로 권태, 판에 박힌 일상과 시시한 좌절 같은 것들이다. 어떤 직업을 갖든, 어디서 살든, 얼마나 벌든 '어른'에게 닥쳐오는 현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성가시고 무의미하게만 여겨지는 일상들.


퇴근길 들른 식료품 가게에서 마주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긴 계산대 앞의 줄, 무표정한 직원의 냉랭한 인사 그리고 꽉 막힌 도로.




물론 "인생이 지루하다"가 그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아니다. 시시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을 마주했을 때야 말로 선택의 작업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는 이런 경우, 생각하는 방법에 분명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 생각하라고 조언하거나 강요하고 있지 않다. 그저 이와 같은 결정에는 강한 의지와 정신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루하고 판에 박힌, 너무나도 일상적인 상황을 의미심장하고 성스러운, 찬란한 체험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의 의지다. 즉 연민, 사랑, 온갖 만물의 내면에 존재하는 융합을 체험하고자 하는 선택이다. (101p)



진정한 교육의 자유, 정서적 안정을 성취하는 배움의 자유가 바로 이것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이고 무엇이 무의미한 일인지 우리 자신이 자각적으로 결정하는 자유를 뜻한다.



무엇을 믿고 싶은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103-104p)






그는 말한다. 믿지 않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믿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무엇을 믿고 숭배하느냐에 대한 선택권일 뿐이다. (107-109p)


우리가 숭배하는 것이 우리를 종속시킨다. 이때 숭배하는 것이 돈, 물질, 육체, 미모, 성적인 매력, 권력과 같은 것들이라면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내용이 신화와 속담, 클리셰, 상투어, 우화 등 모든 이야기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 진실을 전면으로 우선하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숭배는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 디폴트 세팅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날마다 빠져들어 가지만, 자신이 무엇을 보고 어떤 가치관으로 사물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선택 범위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정작 본인이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120-122p)


남성과 돈, 권력이 지배하는 이른바 '진짜 세상'은 우리가 이런 '디폴트세팅'으로 살아가기를 부추긴다. '진짜 세상'의 연료가 공포와 경멸, 좌절과 갈망 그리고 자기 숭배이기 때문이다. (123p)


'디폴트세팅'이 암시하는 자유는 오직 '나만의 왕국'에 군림하는 자유다. 이 자유는 겉으로 보기에 매력적이다. (125p)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승리와 성취로 포장되는 자유보다는 바깥세상에는 자주 언급되지 않는 자유다. (127p)


집중하고 자각하고 있는 상태, 자제심과 노력, 그리고 타인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능력을 수반하는 자유. 이것이 진실로 중요한 자유다.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대단치 않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자유.


너무나 당연하고 근본적인, 우리 주변에 있어 오히려 보이지 않는, 매일 끊임없이 그 존재를 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그런 현실을 각성하는 '깨어있는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자유.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각 있는 어른스러운 일상을 살아내는 건 그 무엇보다 힘든 일이다.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진실은 죽기 전의 삶, 현세에 관한 진실이다.









"이것은 물이다."










*축사 전문을 볼 수 있는 링크 : https://www.wsj.com/articles/SB122178211966454607











내용을 외울 정도로 이 글을 많이 읽었다. 길지 않기에 생각날 때마다 읽는다. 책을 덮으면 잠시 멍해진다. 다시 한번 내용에 감탄했기 때문에. 떠오르는 것이 매번 다르다. '역시 천재야' 생각하면서, 그의 통찰력에 부러움을 느낀다. 복잡하고 깊은 내용을 이처럼 명확하게 풀어낼 수 있다니. 이렇게나 사소한 이야기에서, 그렇게나 무거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니.


난 그가 이 축사를 해줘서 정말 고맙다. 최고의 졸업 축사라고 생각한다. 내가 오랜 시간 동안 혼자 궁금해 한, 아니 어떤 것이 궁금한 건지도 정확히 말할 수 없었던 무언가의 답을 들은 느낌이다. 아마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듣고 싶었던, 궁금했던 것. 그는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어른'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인생은 "인생이 사실 별 것 아니다"를 깨닫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대학만 가면"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대학에 간다고 '나'라는 사람과 '나의 일상'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취직만 하면"이라고 말하지만 그 후의 일상 또한 내가 꿈꿔왔던 것과 거리가 멀 가능성이 크다. "결혼하면", "성공하면" 등도 비슷하다.


화려해 보였던 직업이 실제로 그렇지만은 않다고 깨닫기도 한다. 언젠가 판사의 하루를 다룬 다큐를 봤다. 우리가 보는 판사의 모습은 재판장에서의 위엄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다큐에서 본 판사들의 일상은 지극히 단조로웠다. 여느 사람들처럼 아침 일찍 출근 해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재판 관련 자료를 공부한다. 재판이 없는 날이면 혼자 사무실에서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자료 더미와 싸운다. 검토할 자료가 많은 경우 새벽까지 남아 준비하는 것도 다반사다.


당연히, 의심의 여지없이 판사는 훌륭하고 멋진 직업이다. 하지만 뒤에는 '고된' 혹은 '지루한' 일상이 있다. 물론 이 단면이 그들의 삶 전체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 또한 필연적으로 '일상의 지루함'을 마주함은 분명하다.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자기 머리의 노예가 되는 삶을 경계한다. 세상의 중심이 오로지 나인 '디폴트세팅'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를 따르게 된다. 말 그대로 모든 인간의 '디폴트'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으면 이 '세팅'을 깰 수 없다.


나 또한 내가 세계의 중심이요 내가 경험하는 것이 가장 '실제적'인 평범한 사람이다. 나의 '디폴트 세팅'은 완전히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긴 시간 동안 노력을 하고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앞모습이다. 그래야 나와 너의 세계가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 '마주함'의 중심은 역시 '나'다. '내 앞'에 '현존하는 너'로 타인은 존재한다. '나의 세계'로 '너의 세계'를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뒷모습을 마주할 때, 나는 '네가 바라보는 것'을 경험한다. '내 앞'이 아닌 '너의 앞'이 중요해진다. '자신의 세계'를 통해 '나'를 마주하는 '네'가 아닌 '무방비'의 '네'가 보인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보아 온 아빠와 엄마의 앞모습과 달리 뒷모습은 작았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모습이 작아 보이기 시작할 정도로 내가 자란 것이었을지도. 아빠와 엄마가 바라보는 것, 느끼는 것이 궁금했다. 아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로 멀어져 가는 아빠와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면 마치 내가 그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깊게 이해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삶과 내 삶이 그들의 뒷모습에서 만난다.


친구들의 뒷모습도 보였다.

인사 후 멀어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뒤돌아 바라보았다. 힘든 일을 털어놓고 떠날 때도, 즐거운 일을 축하하고 떠날 때도, 아니면 그냥 별일 없이 웃고 즐기다 떠났을 때도 그 친구가 보고 느끼는 세계가 궁금했다. 이해하고 싶었고, 역시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르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밤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걸어가고 있었고 앞에 한 중년 남성이 걸어가고 있었다. 왜 그토록 관심 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걸이, 약간은 떨궜다 이내 다시 드는 고개, 약간은 처진 어깨가 물리적 그대로가 아니라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다. 양복 차림을 봤을 때 직장인일 것이며 시간상 퇴근길일 것이다. 나이대로 가늠해 보면 아마 가장이겠다.


아마 직장에서의 고된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리라. 회사일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내야 하는 카드값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오랜만에 부모님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학생 때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거나 가고 싶은 여행지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그 순간, 조용한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과 나무들, 깜깜한 밤하늘이 내 것이 아니라 그의 것으로 느껴졌다. 글쎄, 굳이 표현하자면 1인칭 소설을 읽는 느낌이랄까.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그일 수도 있다는 느낌. 저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느낌으로 존재하고 있을지 짐작하는 느낌.


내가 이 세상을 느끼는 방식처럼 이 세상은 그에게도 똑같이 펼쳐져 있겠구나.






일상에서 주의 깊게 '무엇을' 생각할지 선택하고 '어떻게' 생각할지 의미를 구성해 내는 체험은 어쩌면 이렇게나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2008년 9월 1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는 약 20년 간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살이라니. 우리에게 "살아가라" "깨어나라"라고 했던 그인데. 자신들이 물 속에 있는지도 모르는 물고기가 되지 말자고 했던 그가 아닌가.


그를 특별하게 만든, 세상을 바라보는 예민한 감각과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는 관찰력이 오히려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에게 죽음은 삶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인 일종의 구체적인 형태로 다가왔을 테다. 천재들은 보통 사람들이 보는 것 이상을 본다. 때론 그 능력(일종의 abnormality)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의 철학과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글이 하나 있다. A4용지로 출력했더니 30쪽이나 되는 긴 글이다. D. T. Max가 뉴요커지에 기고한 글로 제목은 'The Unfinished'다. 그가 어떤 삶을 산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조금은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해가 된다. (http://www.newyorker.com/magazine/2009/03/09/the-unfinished)















"미완성"


실제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미완성 원고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모든 원고를 완성하고 떠나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모두 우리 나름대로 미완성의 삶을 살아간다. 그저 살아가면서 어떤 원고를 써 내려가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 현세다.













기억하자

삶은 물이다.













*cover image : Photo by Krystian Tambu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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